brunch

매거진 나의 여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상훈 Dec 08. 2024

내가 본 저승

2024. 12. 8.


과거에 나는 꿈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보았다. 꿈이었으나 많이 슬펐다. 꿈속에서 나는 어떠한 이유로 부모님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고향집에 부모님을 뵈러 갔었다. 집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계셨는데, 어머니는 나를 보고 놀라셨다. 언제나처럼 별말 없이 찾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영혼으로 찾아온 것이지 실제 몸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고, 이제 언제 다시 볼 지 모르는 이별을 해야 했으니. 


어머니는 나를 보고 양말을 챙겨 주셨다. 내가 맨발로 있었던 것일까. 추운 저승길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나는 그 꿈을 꾸고 마치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많이 슬프고, 삶이 무엇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무척이나 어둡고 고요한 그곳. 땅에 묻힌 이들이 자신을 구해달라고 하는 곳. 신체 중 유일하게 손만 밖으로 땅 밖으로 빠져나와 자신의 손을 잡아끌어주길 바라는 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모두 다 무덤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한 모습으로 손만 빠져나와 있었다. 저승사자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우리의 일은 사람들을 데리고, 수많은 구멍 위에 하나씩 다 묻어 두는 것이라고. 모든 기억이 사라질 때까지, 모든 삶의 여한이 사라질 때까지. 


풀이 시드는 것처럼 삶의 여한이 모조리 사라진 망자들은 손을 움직이지 않는다. 시들은 풀처럼 생기라곤 하나 없는 무덤들이다. 반면 방금 저승에 도착한 이들에게는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에서 온갖 꿈과 고민, 수많은 목표들을 이뤄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모든 게 끝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저승사자들을 따르지 않고, 세상을 방황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터벅터벅 걸어도, 아무도 그들을 알아볼 수도 없고, 아무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이 세상과 단절된 완전한 외톨이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닐 뿐이다. 터벅터벅 수많은 시간을 보내도, 그들은 그 어떤 것도 채울 수 없다. 그들에겐 욕망이 없기에 괴로움도 없고, 오로지 남은 삶에 대한 의지가 그들을 쉼에서 방해할 뿐이다. 


살면서 수많은 순간 모든 걸 포기하고 그만하고 싶었던 날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무로 돌아갈 준비는 안되었었던 것 같다. 내가 영혼이 되어 마주한 부모님의 모습은 참으로 슬펐다. 자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게 얼마나 큰 불효인지, 얼마나 큰 상실인지.


삶은 고통이면서 동시에 욕망으로 가득 차 있어 고통 속에서 욕망을 움켜쥔다. 영원히 살 것처럼 오만했고, 죽음의 목전에서는 하루하루를 구걸한다. 


이 모습을 막연히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은 아니다. 드라마 '조명가게'를 보고, 그곳의 어둡고, 반복되는 절망이 꿈에서 본 저승의 어두움과 저승의 절망을 담은 것 같았다. 


죽음이라는 가장 거대한 진실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진실 앞에 발버둥 치며, 온갖 신을 믿고, 다음 세상을 기대하며,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씻어내려 끝없는 물줄기 속에 자신을 내려놓는다.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끝없이 놓인 망자들의 무덤에서 망자들은 어떻게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은 것일까.


슬픈 굴레가 아닐까 싶다. 아무도 이 세상에 스스로 선택해서 온 자가 없으나, 정작 살아가야 한다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품고 살아야만 하는 세상. 저승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 꿈에서 본 고요하고 어두운 망자들의 세상일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지옥과 천국으로 나뉜 영원한 단절의 세계일까.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아닌 무로 돌아가는 곳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