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31.
좋은 날이다.
한 해가 끝이 났다.
이번 연도에 들어서면서 나는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너나 나나 올해 운세가 엄청나게 좋으니 만약 운세대로 좋은 일이 많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운세를 믿어보겠다." 그만큼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알려준다는 운세를 믿고 싶었다. 특히나 24년도부터 해서 6년간의 미래가 아주 좋았기에 미신이라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영원히 운세를 믿을 필요가 없어졌다. 대운이 따른다는 2024년은 이미 다 지나가버렸고, 대운은 고사하고 운명과의 싸움을 하기 바빴다. 그렇다. 나는 더이상 사주팔자같은 미신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힘든 일이 많았던 올해지만 연초만 해도 대운이 따르는 듯했다. 다만 부질없이 끝난 게 많았다. 실망도 많이 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부를 만들지 못하는 대표들의 밑바닥을 제대로 보았다. 난다 긴다 하며 자랑하던 이들이 고작 몇백만 원도 못 만들어오고, 살려달라는 모습을 보였다. 안타까웠다. 그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제 내일이면 마흔이 되는 이들도 있었고, 쉰을 넘긴 이들도 있었다. 세상이 침몰해 가면서 이제는 쓸모가 사라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빛나는 시절이 사라지고 나니 초라한 아저씨만 남았던 것이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사업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보게 됐다. 그들 중 대다수는 지금의 실패에 오기까지 실패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엄청난 행운과 부가 그들의 손에 머물던 때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행운의 뒤를 쫓아 살고 있다. 그들이 번 돈은 그들이 숱하게 가던 술집과 마담의 호주머니 속으로 갔다. 아무리 많은 복을 주어도 그만큼을 고스란히 쏟아냈으니 그들에게 담길 복이 어디 있을까.
좋은 시설이 모두 지나간 이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과거를 추억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들은 뼛속 깊이 과거를 후회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때 좀 더 다르게 살 것을 후회하는 이도 있었고, 그때의 선택은 문제가 없었지만 최근의 선택을 후회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두 후회하고 있었다.
사자와 같이 담대한 사업가들이 한 번 이가 빠지고 나서 겁먹은 개가 되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겁먹은 개는 오히려 낫다. 비열한 뱀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뱀으로 사는지, 개로 사는지, 아니면 상처를 치유하여 다시 들판으로 돌아가는 사자가 될지는 그들의 선택이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땅을 기기로 결정했다면 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개밥을 주는 주인 곁에서 개밥으로 연명하고자 하면 개가 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먹잇감을 스스로 쟁취해 오는 이들이 될지 개밥그릇에 만족하는 사람이 될지, 아니면 땅을 기어 다니며 흙을 먹고 다닐지는 모두 본인의 결정인 것이다. 운명은 그 누구에게도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만약 운명의 신이 있다면 신이 놀랄만한 선택을 하는 인물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담대함과 강인함으로 역경을 견뎌내는 인간은 70억 명 중 손에 꼽게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 길을 걷기로 다짐한 사람이 곧 그 사람이 된다. 70억 명 중 가장 초라한 실패자에서 70억 명 중 가장 담대한 인간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신이 있다면 그런 인간에 주목할 것이다. 운명은 그런 이들에게 행운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준다.
인간이 언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어떤 순간이 가장 자신다운 순간인가. 어떤 이는 가장 성공한 순간을 말하고, 어떤 이는 가장 실패한 순간을 말한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인간의 모든 순간이 인간다운 모습이고, 영웅이라고 할만한 사람들도 똑같이 좌절하고, 무너지고, 초라한 순간을 보낸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몇 번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어 겁쟁이가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용기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과하지욕 후에 영웅다운 인간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스스로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할 창피를 겪는 순간도 나 자신이고, 그런 자신을 딛고 거듭나는 것도 나 자신이다. 이 모든 역사가 고스란히 담길 때 인간이 찬란해진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계기를 바탕으로 한 순간에 바뀌는 영화 같은 순간을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새로운 신년이 되거나 특별한 날이나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곤 한다. 과연 그게 정말 중요하겠는가?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긴 78수는 대단하지만, 그를 승리까지 이어지게 한 것은 79수, 80수, 81수가 정해진 곳에 완벽하게 놓였기 때문이며, 동시에 78수가 되기 전 패배로 향해가는 것처럼 보인 77수, 76수, 75수가 있었기에 78수가 존재할 수 있었다.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고, 인정하고 치유해야 할 스스로의 역사다. 힘든 한 해를 보냈다고 해서, 누군가 때문에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고, 세상을 욕할 순 있어도 손에 쥘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은 나의 역사이고, 그 역사가 있기에 훗날의 내가 더 찬란할 수 있다.
비겁한 길을 택하는 대표들도, 땅을 기어 다니며 흙을 뜯어먹기로 하는 대표들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박쥐처럼 다니는 대표들도 모두 용서한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젊음을 헛되게 낭비하게 한 이들이 있어도 그들을 용서한다. 동시에 내가 보잘것없을 때 나를 믿어준 이들에게 감사하고, 내가 힘이 들 때 묵묵히 곁에 있어준 이들에게 감사한다. 함께 웃고 떠들며 보낸 순간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이 내 삶의 가족이고, 형제이고, 선생이었다.
한 해를 보내며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고, 용서해야 할 것을 용서한다. 미움과 원망을 모두 비워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고, 옛 몸과 옛 정신을 가지고 찬란할 미래를 담을 순 없다. 나는 다음 해로 넘어간다. 과거의 잔재는 모두 버린다. 가슴에 묻어둔 쓰레기를 시원히 버리고, 신년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