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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여정

데스페라도

2025. 1. 2.

by 한상훈
전인권 - Desperado


데스페라도라는 말을 들어봤어? 무법자를 뜻하는 말이야. 그래서 위의 노래는 법을 지키지도 않고 멋대로 살아온 누군가를 향한 노래야. 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 망나니 같은 사람에 대해 따뜻한 조언을 해주고 있지. 그 망나니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들을 거부하는 것 같아. 그래서 작가는 '이제는 마음의 문을 열고,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라고 말해주고 있어. 이 곡은 그런 말도 안 듣는 무법자 친구를 위한 노래야.


어린 시절엔 무법자로 산다는 게 법 위에 서는 것 같아 멋있어 보였던 것 같아. 학교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고 맘대로 살던 형들을 보는 것 같겠지. 그런데 막상 그렇게 잘 나가 보이는 형들도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는 날이 오면 초라해지더라.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규칙 하나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게 멋진 일인 줄 알았는데, 정작 규칙을 잘 지키면서 멋있는 남자가 되는 게 더 어려운 일이고, 더 대단한 일이더라.


고분고분 세상의 규칙을 다 따르고 산다는 것 보기보다 쉽지는 않아. 악당으로 산다는 것은 쉬워 보여도 매일매일이 초조하고, 인생의 뒤가 없어 어두운 길을 걷는 것과 같지.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아무것도 모르니 말이야.


이 글을 보고 있을 너는 이제 어린애가 아닐 거야.


그렇기에 더 이상 철부지 무법자로 살 수는 없을 거야. 마음속 한 편에서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겠지만, 그건 멋지지 않아. 손에 있는 젊음이라는 퀸 하나를 믿고 게임을 지배할 수 있을 것처럼 날뛰고 싶겠지만 그 퀸이 네 손을 떠나 배신하는 순간 너에겐 무엇이 남을까. 네 손에 쥔 짧은 젊음의 시간과 건강한 육체는 고작 몇 년 후면 떠나.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새벽을 지새우며 놀 힘도 없을 것이고, 너랑 같이 스스로의 시간을 망가뜨릴 친구들도 점점 남지 않을 거야. 이제 넌 법을 지켜야 할 시간이 온 거야. 이제 어른의 게임을 해야 할 순간이 온 거야.


체스를 해보면 알겠지만 퀸은 가장 강력해. 그러나 체스에서 퀸을 잃었다고 해서 경기에서 진 것은 아냐. 모든 기물을 이용해서 싸우는 것이 체스라는 게임이지, 퀸만 써서 모든 기물을 잡아먹는 게임이 아니라고. 그런데 이 체스에서도 데스페라도, 무법자 전술이라는 게 있어. 그게 뭘까? 이판사판 될 대로 되라는 무법자처럼 너 죽고 나 죽자 전략을 데스페라도라고 해. 어차피 이미 죽게 생겼으니 눈앞에 보잘것없는 기물 하나라도 죽이고 죽겠다는 전략이지.


체스의 데스페라도처럼, 인생의 데스페라도도 비슷한 상황에 놓이곤 해.


'어차피 망가진 인생이니 더 망쳐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제 시작하기엔 늦었으니 그냥 다 포기하자.'


체스에서 죽음에 놓인 기물이 할 법한 생각이지. 적이라도 한 명 죽이고 가면 좋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쉽게 안 끝나. 망쳤다고 해서 바로 다음날 우리가 죽을까? 아니. 인간은 쉽게 망하지 않고, 망하기로 결정한 수많은 선택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쌓여야 망해. 하루 이틀 게으르다고 인생이 망할까? 절대로 안 망해. 하루 이틀이 아니라 1년, 2년이면 망할까? 그래도 안 망해. 10년쯤은 꾸준히 게으르고 기생충처럼 살아야 그때쯤부터는 망했다고 말할 수 있어. 인간은 쉽게 망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쉽게 대단해질 수도 없어.


재밌는 사실은 젊은 네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기물인 퀸은 이제 곧 떠난다는 점이야. 왜 10년쯤 게을러야 인간이 망한다고 했을까? 그건 젊음이라는 퀸이 아직 네 손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지. 만약 네 손에 그전까지 얻어둔 지식이라는 나이트가 있고, 친구라는 룩이 있고, 부모님이라는 비숍이 있다면 네 게임은 좀 더 버틸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가지고 있는 기물은 영원히 네 편에 있지 않아. 네 기물은 하나 둘 떠나게 될 거야.


그렇다면 모든 기물을 잃기만 하는 게임을 우리는 해야 할까? 체스에선 역전이 존재하지. 가장 하찮아 보이는 폰이 판의 끝까지 도달하면 무엇이든 바뀔 수 있어. 폰을 가지고도 퀸을 만들 수 있지. 현명한 플레이어는 퀸을 잃었다고 절망하지도 않고, 비숍을 모두 잃었다고 망했다고 좌절하지도 않아. 킹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판을 포기하지도 않아. 폰이 한 걸음씩 전진해 끝에 도착하면 퀸이 되고, 경기는 기물의 숫자로만 승패가 결정 나지 않아. 인생도 똑같이 그런 순간들이 있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이들에게 신이 종종 선물을 주거든. 늦게 피는 꽃은 우리 곁에 존재해.


기물을 모두 잃은 판에서 폰을 끝까지 밀어붙여 퀸을 얻었다면, 그 퀸은 공짜로 받은 퀸과는 분명 다른 느낌일 거야. 네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고 나서 다시 그것을 얻었을 때 얼마나 소중할까. 아마 처음 이 판을 시작할 때보다 더 흥미진진해질 거야. 네 손으로 얻어낸 퀸으로 상대의 숨통을 압박하고, 상대는 긴장하기 시작했거든. 네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수백 가지로 늘어나게 될 것이고.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와. 끝까지 폰을 밀어붙인 사람들에게는 말이야.


네가 과거에 무법자처럼 과거에 살아왔다고 해도 앞으로 그 패턴을 유지할 필요는 없어. 멍청한 플레이로 기물을 다 날려 먹었다고 해도 상관없어. 체스판과 달리 인생에서는 아주 많은 폰이 우리 손에 있고, 폰을 한 걸음씩 전진시킬 기회는 아직 남아있으니까. 네가 가진 폰들 중 단 하나만이라도 체스 보드의 끝까지 보낼 수 있다면 너는 죽음 직전에 다시 젊음을 찾은 노인처럼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거야. 퀸을 얻어내는 것은 힘든 길이지만 얻는 순간부터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어.


그렇기에 너는 현명해져야 해. 모든 플레이어는 자신의 턴에 하나의 기물만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일 수 있어. 폰을 움직인다면 하루에 한 칸만 움직일 수 있다고.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똑같아. 그들이 가진 폰 역시 단 한 칸만 움직일 수 있고, 너도 그 규칙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일 뿐이야. 그렇기에 그들과 완전히 같은 게임이야. 아직까지는 네 마음대로 게임을 했다면 이제는 전략을 가지고 움직여야 해.


손안에 모든 기물이 넉넉한 친구들이 부럽다고? 부럽겠지만 그들이 가지고 노는 기물은 폰이 아니야. 그렇기에 그들은 인생을 살면서 폰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해. 그래서 그들은 많은 기물을 가지고도 패배를 두려워하곤 하지. 진짜 체스 플레이어라면 기물의 숫자를 뛰어넘어 승리를 쟁취하니까.


네 손에 적을 이길 기물이 없다면 폰을 살려 네가 원하는 기물부터 만드는 게 방법이 될 거야. 어느 폰을 택하든 가던 끝까지 가야 해. 너는 네가 가진 기물을 지켜야 해. 너의 퀸, 비숍, 룩, 나이트 그리고 폰은 영원히 네 곁에 머물지 않아.


이제 너는 젊지 않아. 어른의 게임을 할 때야. 게임의 룰 안에서 기물을 지키는 싸움을 해야 할 때야.

그러니 어른답게 행동해. 어른답게 결정해. 그러면 네가 승리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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