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
내가 독재 정부를 혐오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은 정보와 사고까지도 배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보여준 것만 봐야 하고, 가르친 것만 배워야 하며, 허용되지 않는 생각은 검열한다. 민중의 생각까지도 배급제로 두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오만함의 결과다. 자신들을 제외한 민중은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제한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창조와 혁신이 꽃피울 수 있을까. 정보마저도 배급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급받은 정보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정보인지 알 수 없다. 아주 오랫동안 그 정보를 먹고 마시며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것이 사회가 되고 가치관이 된다.
밥도 배급해 주고, 일자리도 배급해 주고, 살 집도 배급해 주고, 보면 위험한 것들을 모두 국가에서 알아서 막아준다니. 어떤 이들에게는 이 모습이 유토피아로 보이겠지만 나는 이러한 배급 사회의 이면에 있는 철저한 계급 사회가 더 구역질 난다.
배급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누구는 좋은 집에 살고 누구는 안 좋은 집에 살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권에 도움이 되는 인물과 아닌 인물을 가려 계급화하는 사회에서는 배급이라는 이름으로 차별과 착취의 벽을 만드다. 당에 미운털이 박힌 유능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허드렛일을 하고 가장 열악한 곳에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 반면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하지 못하는 이들도 당에 복종하는 충성심만 보인다면 그보다는 나은 삶을 보장받는다. 그들이 조금 더 나은 삶을 노동 없이 누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해야 할 노동을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하위 계층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착취로 만들어진 부의 불평등의 몫을 누리는 이와 착취당하는 이들이 나뉘고, 열심히 일한 자가 도리어 낮은 취급을 받는 비정상의 사회로 나아간다.
이들은 배급을 아주아주 좋아해서 사상과 정보마저도 배급받는다. 개인의 생각 따윈 필요 없다. 생각을 배급해서 나눠주면 된다는 게 그들의 논리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말하지만 평등하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평등했다. 조지 오웰이 옳았다. 적어도 독재국가들한테서는.
윅슬리에 세상이 전 세계적으로는 더 왔다고 생각하지만 조지 오웰이 두려워한 미래는 정보의 배급까지 이어지고, 배급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대중은 판단할 수밖에 없다. 슬픈 현실 아닌가. 보고 싶어도 볼 수 있는 게 한정적이다. 동굴 밖을 나가 세상을 봐야 하는데 동굴 안에서 빛이 들어오는 구멍만 보고 있는 격이다. "동굴 밖엔 무서운 공룡이 살고 있어요!" 당에서 그렇게 떠들면 "절대 동굴 밖으로 나가면 안 되겠네요.."하고 겁먹는 사람들인 격이다. 벽을 넘어야 함에도 벽을 넘지 못한다. 동굴 밖으로 뚫고 나가야만 검열 없는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 목숨만 걸어야 하나? 아니. 가족들의 목숨도 걸어야 한다. 시발. 참 좆같은 세상이 아닌가. 벽 안에 갇힌 가족들을 이용해 자유를 박탈한다는 것. 정말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죄악을 그들은 하고 있다.
곡사포로 사람을 찢어 죽이던 토막 내 죽이던. 강제 노동으로 삶 자체를 강탈하든. 그들은 자정을 하지 못하는 썩은 물이기에 그 썩을 물을 마시고 살게 된 자들은 다 똑같아진다. 똑같이 썩어 들어간다.
지난 몇 달 동안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마주했다. 지독하게도 많은 인간들이 북쪽에 돈을 보내려고 별 생각을 다 하는구나. 자신의 수중에 떨어지는 돈만 있다면 인간은 그 어떤 짐승보다도 천박해질 수 있구나.
한 트럭의 개새끼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어떻게 세상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TV에 나와 사람들을 속이는지 볼 때면 이 세상에 대한 마음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곤 한다. 이 세상에 대한 애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알면 알수록 더러움은 끝이 없고, 이기심 또한 끝이 없다. 이딴 세상에서 내가 계속 살아야 할까. 현재의 사법 시스템으로는 감옥에도 보내지 못하는 초법적 인간쓰레기들을 그저 내버려 두고 같은 하늘에서 살아야 한다고?
세상 사는 재미가 떨어질 때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생명력 속에는 타르보다 끈적거리고 더러운 욕망을 보게 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악을 마주하면 그것을 피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된 거 그냥 저들의 말로가 어디로 흐를지 냇가에 앉아 목이 떠내려가는 날을 기다리며 쉼을 찾아야 할까. 어차피 벽 밖의 자유를 꿈꾸며 살아왔으니 아무도 없는 벽 밖으로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곳엔 상점도 없어 먹을 게 없고, 집도 없어 누울 곳도 쉴 곳도 없이 거인들의 위협에 벌벌 떨며 움직어야 했다. 거인들에게서 자유로워지려면 거인과 상대해 그들의 목을 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지긋지긋한 사상 주입의 개밥그릇을 내다 버리고 나니 모든 게 자유롭다. 그래서였을까. 그들이 죽음도 감수하며 떠났던 이유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떠난 이는 말이 없고 남은 이는 거인의 공포 속에 산다. 개밥그릇 같은 배급판을 내다 버린다. 더는 동굴 안에 살고 싶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