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1.
이사야 58장 6~12절
왜 인진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무렵부터 나는 성경을 지독하게도 많이 읽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읽었던 부분은 이사야서다. 이사야서에 담긴 메시지는 나에게 실제적인 목표가 되었다.
1. 사람들을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어라
2.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라
3.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4. 빈민에게 베풀어라
5. 약한 자에게 심정을 동하고 괴로워하는 자를 도와라
그것뿐이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영광이 뒤를 호위하고 내가 어디서든 부를 때 신께서 응답하리라 라는 이 메시지가 와닿았다. 그래서였는진 몰라도 나는 에녹이 신과 동행했던 것처럼 오랫동안 신을 친구로 대했다. 다만 위의 내용대로 내가 살기보다는 내가 위에 속한 사람처럼 결박됐고, 가난했고, 괴로웠기에 더욱 뻔뻔하게 신을 친구처럼 대할 수 있었다.
가진 게 쥐뿔도 없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별 볼일 없는 나에게 힘이 있다면 그건 내 힘이 아니라 내 뒤에 있는 누군가의 힘일 것이다. 그 누군가를 단정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 또는 천사로 말하고 싶지 않다. 진리를 인간의 언어로 담기 위해 거칠게 난도질된 표현들이 교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나는 부처의 가르침에도 마호메트의 가르침에도 진리의 실체가 실존한다 생각한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교리화하여 먹고살기 위한 종교인들을 위한 해석들이 가미되었을 뿐 진리는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진솔해야 한다.
신의 명령은 충분히 들었으나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같다. 나는 사명감에 해수 담수 플랜트를 비롯한 토목공학 쪽으로 살아갈 생각을 했었다. 뜨거운 아프리카에 가서 마실 물을 제공하고, 무너진 도시를 건축하기 위해 항만, 다리, 도로, 인프라를 건축할 일들을 꿈꿨다. 그래서 대학도 1 지망에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를 넣었던 것이다. 내 길은 무너진 곳을 다시 짓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물론 그건 내 착각이었는지 인생은 전혀 토목 분야로 나아가진 못했다. 대학생 때 선교회에 있으면서도 괴리감을 느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뜻을 따른다. 인생을 내던져서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기 위해 애쓰는 이들도 거의 없고, 압제당하는 이들과 싸우는 이들도 없다. 내 신앙으로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받은 것의 차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이 받은 자는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말씀처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의 깊고 선명한 지식을 많이 받았고, 그랬기에 이러한 명령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이야 남들에게 내 기준을 받아들이라 하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동일한 기준을 따르고 싶어 한다. 물론 내 코가 석자라 내가 결박됐고, 내가 빈민이고, 내가 약한 자인 것 같지만 말이다.
종종 나는 이 세상에서 죽는 순간 게임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여나 지금 순간이 너무 힘들다고 자살해 버린다면, 게임에서 깨어난 나를 보며 친구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야 그 고생을 20년 넘게 하고 자살을 하면 어떡하냐. 너무 아깝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이 모든 게 게임이던 영원한 삶을 위한 전초 과정이든 뭐든 간에. 고생을 그 정도로 했으면 열받아서라도 성공 한 줄을 긋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싶은 게 맞고. 이왕 성공할 거면 죽어서도 쪽팔리지 않게 사람들을 억압하는 놈들과 투쟁하며 살아가는 것이 뿌듯할 것 같았다. 영원한 자랑스러움이겠지. 그거이야 말로 영원한 자랑스러움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 모든 것에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볼 때면 언제나 비슷한 상상을 한다. 좋은 집에서 살고 싶고 행복을 찾고 싶기도 하지만 지구 반대편 뜨거운 나라에 가서 그곳을 재건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그곳의 아이들도 나처럼 농구도 좋아할 수 있고, 야구도 좋아할 텐데. 그곳의 아이들도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고, 드럼도 배워보고 싶을 텐데. 누군가에게는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는 축복 같은 삶이 누군가에겐 10년을 간절히 기도해도 얻기 힘든 사치라는 게 이 세상의 이상한 부분이다.
나는 여전히 내 길을 매일 같이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사야에 나온 가르침을 따라 산다면 어느 곳에서든 아무런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다 생각한다. 수많은 살인자들 앞에서라도. 수많은 범죄자들 사이에서도. 전쟁 통에서도 말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보면 거인 골리앗과 소년 다윗의 대결로 나온다. 골리앗은 소년 모습의 다윗만 보았으나 다윗 뒤에는 더 큰 이가 있었기에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난 상태였다. 가장 강대한 분이 누구와 함께 하는가에 따라 그 어떤 군대도 삼킬 수 없는 이가 될 수 있지만, 아무리 강대한 사람이라도 잘못된 길을 택하면 손쉬워 보이는 전쟁에서도 패배한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무언가를 성공해 낼 수 있으리라 믿지는 않는다. 내가 택한 길이 맞다면 내 등 뒤에 나와 함께하는 이가 있을 것이고, 내가 택한 길이 잘못됐다면 이 길은 아무리 멀리 가도 막힌 길일 것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잘 나가고 꼭대기까지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추락하는 수많은 별들을 보면 그들이 적당히 성공했더라면 추락도 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빠르게 밀들 사이에서 커가는 가라지의 비유처럼 어쩌면 신은 그저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있을지 모른다. 가라지가 빠르게 자라 꼭대기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먼저 불에 타들어가게 될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수보 할 것인가는 나의 후손들의 일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이사야의 가르침대로 투쟁할 뿐이다. 대단한 이유도 없다. 그거라도 해야 허무한 이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자기 위로일지 모른다. 이미 한 번 죽은 것과 같은 몸에서 구원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난 그저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고 싶다. 대단한 꿈도 목표도 없다. 박살 난 곳이 다시 건설되어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다. 자유가 거세된 이들이 자유를 찾았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이들과 먹을 것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그럴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뿐인 것 같다. 나의 허무한 삶에 꼭 쥐고 싶은 얼마 안 되는 희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