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써보고 싶어졌다
햇빛이 나쁘지 않은 날이다. 서울에도 조금씩 꽃은 피었다. 늦은 벚꽃을 보니 반가운 마음도 아쉬운 마음도 든다.
어제는 잠을 잘 수 없었다. 피로감이 꽤 있는 하루였다. 오후엔 중요한 협상 미팅을 준비했고,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지만 오늘은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협상의 한 단계를 성공했기 때문이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 한참을 거래 기록을 살펴보았다. 시스템에서 대량 거래 시에 요청 금액의 전량이 매수되지 않아 생긴 문제가 있었다. 크리티컬 하진 않았지만 점점 더 큰 금액을 다루기 위해선 고도화가 필요했다. 숫자를 하나하나 기입하고 수식과 알고리즘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새벽 1시쯤 됐을까.
피로감에 잠을 들려했지만 이상하게 잠은 오지 않았다. 어젯밤 꾼 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끔찍한 살인 장면을 목격한 동네 마트 아르바이트생이 된 꿈이었다. 이 꿈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시놉시스를 짜보고 싶어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참을 시놉시스를 설정하고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만들어보았다. 워낙 많은 미디어에서 살인, 스릴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강렬하고 선명한 이미지가 필요하다 느꼈다. 내가 선택한 건 음식물 쓰레기봉투와 갈아버린 시체라는 콘셉트이었다. 살인마는 언제나 피해자의 신체 일부를 토막내서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담아 과시하듯 버리는 콘셉트를 정했다.
그렇게 시놉시스를 짜면서 장면 장면에 대한 임팩트는 상상이 됐지만 이것을 일관된 서사와 기승전결을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시놉시스를 잘 짜기 위해선 캐릭터의 정당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캐릭터의 행동은 캐릭터가 살아온 환경과 유전자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살인마라도 해당 살인마가 살인마로 활동하기 전까지의 유년시절이 존재하며 그 유년시절을 통해서 살인마의 행동은 인과적으로 서술되어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 수도 있고, 혼선을 줄수도 있다.
소설을 거의 써본 적이 없지만 캐릭터를 만들어가며 서사를 만드는 것은 가상의 인간을 창조해 그에게 삶을 부여하는 느낌이 들었다. 신이 소설가라면 인간을 이렇게 빚어냈을까.
서사가 완성되면 최종적으로 캐릭터는 시각적 실체로 완성되어야 한다. 키, 나이, 외모적 특징, 성별, 선호하는 옷, 선호하는 음식, 몸에서 나는 냄새, 좋아하는 신발, 액세서리의 유무, 머리 스타일, 학력, 현재 직업, 재력, 친구 관계, 연인 관계, 가족 관계... 인간을 구성하는 수많은 항목들이 모두 정의되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삶을 유추할 수 있고 소설가는 그것을 심상으로 구성해 타인의 삶을 관조하듯 담아내면 된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선명한 심상을 가지느냐와 얼마나 섬세한 표현으로 이야기가 서술되는지에 따라 글은 천지차이가 될 것이다. 선명한 비전을 보고 있는 소설가가 보는 세계는 현실 세계를 담은 것처럼 높은 해상도의 사진처럼 출력될 수 있다. 그렇기에 소설의 기반이 되는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의 구성원들을 하나하나 빚어내는 일만 하더라도 꽤 오래 걸리는 일이다.
물론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정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세계관을 가지고 주인공의 시점에서 부여하고 싶은 이벤트를 정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법도 있다. 둘 다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고 어떤 것도 정답이라 말하긴 어렵다. 그렇게 나는 몇 시간 정도 시놉시스를 짜고 큰 스토리 라인을 잡고 나니 늦은 새벽이 되었다. 표현이 이상한가. 시간은 지나고 지나 새벽 5시쯤이 되어서야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소설을 그리듯 상상하면서 영화적 상상을 했다. 나는 이전에도 짧은 스토리의 영상을 담아 연기를 담는 작업을 하는 걸 좋아했다. 내가 연기자가 아니라 타인의 연기를 담아두는 영상을 찍는 것이다. 그렇게 담은 연기를 편집하는데 그것이 어찌나 재밌던지, 후져 처먹은 컴퓨터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편집에 몰두했다. 감사하게도 그렇게 만든 영상들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즐거움을 주었던 것 같다. 보는 사람마다 아주 즐거워했으니.
만약 내 인생에 기회가 더 있다면 이런저런 삶을 온전히 누려보고 싶기도 하다. 원래 되고 싶었던 건축가의 삶도. 온전한 해커의 삶도. 이야기를 서술하는 소설가의 삶도. 기타를 멋지게 연주하는 기타리스트의 삶도. 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다면 재즈 피아니스트의 삶도. 이제는 온전하게 해내기엔 나이를 먹어갔고, 현재 내가 정한 일과 회사로 바삐 살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시간을 내 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얼마나 진득하게 소설을 더 쓰게 될지 모르겠다. 소설 속 세상을 창조하면서 가장 끔찍한 악인을 떠올리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그들에게 무고하게 죽어야만 하는 비극적 조연들도 생각해내야 한다.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선 누군가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기승전결. 그 어떤 스토리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 행복, 행복, 행복. 아무런 갈등의 고조도 없이 행복하고 또 행복했습니다로 끝나는 이야기는 없다. 아무런 재미가 없다.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인물들과 사건들과 눈물짓게 하는 상황이 토양으로 존재해야만 그 거름을 바탕으로 독자를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데려갈 수 있다. 그것이 재밌는 이야기의 딜레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기 위해서 더 많은 악과 더 많은 살인과 더 끔찍한 일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현실을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의 눅눅함과 쿰쿰함. 찌는듯한 찜통의 더위와 끈적한 땀냄새까지도. 불쾌할 수 있는 감각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글에 사람들을 더 몰입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현실적이고 공감각적이다. 글 속에서 냄새가 느껴지도록 하고, 글 안에서 피비린내가 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예술이라 할만하다.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 감정도 만들어내게 하는 힘이 있으니.
아직까지 나는 에세이나 기술 서적을 집필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왔다. 가끔 소설을 써보긴 했지만 스스로가 봐도 미흡했다. 취미로 글 쓰는 사람이 얼마나 쓰면 독자를 마지막 페이지의 마침표까지 이끌어갈 수 있을까.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괴로움을 순간이나마 잊게 만들어줄 시원한 생수 같은 이야기가 되기를. 여름철 만난 얼음이 둥둥 뜬 차가운 물처럼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를 바라며 나는 소설의 바닥을 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