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8.
지금도 공기업 임원이나 전 증권사 대표님, 시중 은행 임원 분들, 전 은행장이나 금감원 분들께 연락하는 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딱히 같이 일하고 싶지도 않고 그들과 무언가 하는 게 여러 가지로 피곤하다. 대부분 자신이 속해있던 거대한 기업의 품에 있을 때는 방귀 꽤나 뀌는 사람들이었겠지만 은퇴를 하고 나면 자신을 보호할 방주가 필요한 법이다. 마치 여름방학 숙제를 안 하고 방학이 끝나버린 것처럼 5대 은행 퇴직 임원들이나 퇴직연도 마지막까지 잘 채워서 나가는 공기업 임원들. 그들은 시장에서는 그렇데 대단하게 보지 않는다.
우스운 일이다. 왕관이라도 하나 쓰고 깜빵에 다녀오시지 하는 말이 괜히 나오지 않는다. 한 번은 내년 퇴직하는 공기업 임원 분을 전 증권사 대표님이자 로비스트로 활동하는 분께 소개를 시켜드린 적이 있다. 나름 플레이가 가능해서 연에 못해도 억 단위로 챙기시는 로비스트 분이시라 서로에게 도움이 될 줄 알았지만 퇴직까지 사고 안 내고 착실하게 다닌 임원은 쓸 곳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지. 나름 지역 사무실 건물에서 가장 좋은 곳에서 대장 노릇하며 살아온 분인데 이 권세도 1년도 안 남은 유효기간제 권세라니.
조계종을 비롯해 여러 주요 불교 단체와 더불어 온갖 사이비 교단들의 임원들도 볼 일이 많았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종교 단체는 종교로 돈을 버는 단체가 아니다. 종교는 정서적 서비스 업으로 푼 돈벌이를 하기도 하지만 세탁 서비스를 암암리에 하거나 교인들을 쥐어짜 벌어낸 돈을 가지고 이런저런 노다지 사업에 많이도 투자한다. 왜 정치인들이 선거 시작할 때 종교 단체 수장들을 만나나. 서로 오고 가는 게 있지 않고서야 그저 믿음으로 후원해 달라고 응원해 달라고 그 만남을 할까.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지만 알고 보면 더 그런 곳이다. 여의도나 월스트리트나 다르겠나 싶고. 상하이와 홍콩이 다르겠나 싶다. 나는 그분들에게 있어서 효용성이 있는 칼이었다. 나는 금융과 로비스트들이 좋아하는 전략을 별다른 설명 없이도 곧잘 이해했다. M&A 시장에서 사용되는 용어들 정도만 공부가 따로 필요했을 뿐 나머지는 식사하고 회의하다 보면 다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든 기술적 검토나 리스크나 그 과정에서 소프트웨어적 도움이 필요할 때 나는 맥가이버 칼처럼 쓰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회장님들을 비롯해 퇴직을 준비하는 시중은행 임원들이나 공기업 임원 분들. 증권사와 은행장 분들. 약간은 외줄 타기를 하는 금감원 분들이나 FIU 분들까지도. 대부분 그분들이 놀랐던 것은 내가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대부분 알아듣고 그것에 대해 답변을 즉각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분들은 처음엔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지 몰라도 30분만 이야기하면 그들이 원하는 답을 구조화해서 줄 수 있었다.
대부분의 부자들이 원하는 것은 정해져 있다. 대부분의 퇴직을 앞둔 금융계 최고 인사들이 원하는 것은 정해져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자신이 처한 상황은 크게 느껴지고, 이해받기 어렵다는 프레임에 갇히곤 한다. 그런데 정작 보편적 시각에서 보면 뻔한 고민이고, 변주 없는 멜로디다. 거의 유사한 케이스를 수없이 듣다 보면 자동 반사처럼 답변을 완성할 수 있는 건 상식이지만 거기에 더불어 법이 필요했다.
물론 법률 서비스는 법적으로 변호사가 하는 것이 맞고 그것으로 돈을 받는다면 그것은 명백한 법률 상담이라 변호사가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돈도 안 받고 그분들이 원하는 대부분의 답변에 대해 법을 근거로 답변할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똑같은 질문을 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분에게 내가 질문을 해서 답변을 받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전설이라 불리는 분을 소개받아 그분에게 조언을 받고 해당 내용을 충분히 공부해 똑같은 상황을 마주한 분들에게 대응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내가 생각하는 여러 케이스까지 설명하곤 했다. 아무래도 최신 사건들은 가장 기준이 되는 법리적 해석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중요한 건 법률 상담 정도가 아닌 시스템과 그것에 대해 온전히 투사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별별 독특한 경험을 하면서 이 분들과 재밌는 시간도 많이 보냈고, 말도 안 되는 딜을 수 없이 봤다. 지금이야 바람 빠진 타이어 같지만 탄핵당하기 전 윤석열 대통령님과 밀접한 관계라는 사람들부터, 서로 정반대가 되는 정치 세력 분들까지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정치 세력 분들을 만나면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명함이 온통 한자여서 어지간해서는 뭔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당연히 기술적 설명은 아무 쓸모가 없다.
그렇게 온갖 프로젝트를 누비면서 세상의 통찰을 키웠지만 정작 이들과 일하면서 내가 깨닫게 된 건 선명하다. 실체가 선명한 사람들은 무겁고, 실체가 별 볼일 없으면 가볍다. 가벼운 이들은 쉽게 약속하고 지키지 못할 말들을 한다. 이들에게는 그저 커미션으로 얼마 남겨 먹어 1년 장사하는 게 목표인 이들도 있다. 아예 꾼이 된 거지. 정상적인 방법으로 건실하게 사는 방법은 이들에게 없다. 그냥 큰 건 하나 잡아서 적게는 몇 백부터 크게는 몇 십억까지 한 방에 당길 생각뿐이다.
그들과 술잔과 밥그릇을 나누며 꽤 지내다 보니 나는 금융계에서 이뤄지는 온갖 인간 말종스러운 전략들은 꽤 배울 수 있었다. 망한 회사 CD를 발행해서 한몫 챙기고 뒤통수를 제대로 치는 방법부터 주식시장에서 이뤄지는 작전 세력의 플레이까지도. 워낙 금감원이 잘 본다곤 하지만 전략이 아예 없지도 않았다. 밥 먹고 나쁜 짓만 연구하는 사람과 밥 먹고 나쁜 짓을 잡을 생각만 하는 사람끼리 붙으면 누가 이길까? 그 누구도 무조건 연승할 수는 없다. 서로 창과 방패로 한 수씩 주고받을 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백, 수천의 일자리가 걸린 사업들이나 또는 그에 준하는 사람들의 인생이 걸릴 일에도 오로지 돈만 볼 수 있다면 로비스트 같은 직업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금융이라는 전쟁터에 낭만을 거세하고 책략가로 승리만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선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
그렇기에 나는 금융권 플레이어들의 러브콜 아닌 러브콜을 종종 받아왔다. 조선호텔의 전망 좋은 사무실에서 함께 자리하나 하고 일을 해보자는 대표부터 삼성역과 봉은사를 거점으로 괜찮은 부티끄 사무실을 두고 온갖 금융 플레이로 해결해 주는 PM을 하는 것까지도. 근데 나는 그런 관계들을 싹 정리해 갔다. 그저 더 연락하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은 아닌 것 같았다.
한 번에 큰돈을 버는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에 대해서 악감정은 없다. 그러나 보통 이러한 거래를 주선한 이들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책임 없는 이점만 가져간다는 점이다. 그들은 책임을 지는 일이 결코 없다. 설령 거래 과정에서 명백한 실수가 발생해도 도의적 사과나 실질적 보상을 하는 경우를 보기 힘들다. 이들은 언제나 법적으로 완전하게 자신을 방어하며 리스크 없는 싸움을 한다. 리스크는 누가 지는가. 더 간절하고 힘든 쪽이 진다. 실제 이것으로 사업을 진행하거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이들이 진다. 마치 전세 사기가 일어날 때 이 거래를 주선한 부동산 중개인과 다를 바 없다. 법적으로는 부동산 중개인을 처벌하진 못하지만 전세 사기꾼을 걸러주지도 못하고 계약을 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론 선량한 피해자가 생긴다.
문제는 금융 플레이를 하는 이들은 선량한 피해자에 대한 도의적 책임감이 보통은 없다. CD 발행을 하거나 유상 증자를 하면서 회사를 거품으로 끌어올리는 전략이나. 껍데기로 만든 기업 스펙 상장이라는 이름으로 펌핑을 하거나. 이름 모를 SPC를 설립하고 부동산을 매개로 자본 순환을 하면서 돈세탁과 주가를 동시에 끌어올리는 것이나. 나는 이들이 하는 플레이를 아주 천부적으로 빠르게 이해했고 금융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법을 피해 무에서 유로 돈을 창조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온갖 자본시장에서 잠재적 피해를 야기할 일을 하더라도 죄책감은 안 느낀다. 멍청하게 그런 상품에 투자한 개개인을 탓하고 축배를 들 수 있는 이들이다. 내가 출생이 언더독이라 그런지 몰라도 나는 그런 식으로까지 돈을 벌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를 기만해 돈을 벌어 인생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심장을 돈을 통해 도려낸 것과 다르지 않을까. 물론 우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그 짓을 해서 그것에 속아 넘어갈 사람을 속아 넘어갈 것이라는 이들도 있다. 어차피 그들은 사기당하던 주식을 해서 망하던 어떻게든 망할 사람들이니 먼저 털어먹는 게 이득이라는 마인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파트너분들과 자주 하는 말은 언제나 같다. 선명한 피해자가 나와선 안된다는 점이다. 이 당연한 말이 금융에서는 당연한 말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금융 플레이에 현기증을 느끼고 그들의 판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는 걸 딱히 즐기지 않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