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원수로 갚고 더 큰 책임에는 투덜거림으로 일관하기
사람의 그릇이 각자 다르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들의 그릇은 보나 마나긴 하다. 은혜를 원수로 왜 갚을까. 은혜를 받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열등함을 감추고 싶어서일까. 둘 다일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어떤 논리도 만들어낼 수 있다.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타인에게 화살을 돌리는 게 편한 길이니까. 죄책감을 느끼며 은혜를 갚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내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해'하며 은혜 베푼 이를 적으로 두는 게 속 편한 일일 것이다.
이들은 슬픈 저주에 사는 것과 같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가 어떻게 장기적으로 좋은 운명을 마주할까. 은혜를 베푼 이를 적대시하면 그것은 언젠가 자신에게 칼로 돌아간다. 은혜를 베푼 이도 악으로 여기는 이가 좋은 관계를 그 누구와 만들 수 있을까. 그들은 스스로 만든 저주에 갇혀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며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주변에 악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악한 인간이 선을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악하다 나쁘다 인정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 감정을 거세해서라도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죄책감의 감정을 잘라낸 이에겐 무엇이 남을까. 더 행복한 인생? 더 즐거운 관계? 그들의 삶을 쭉 봐야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큰 은혜를 감당할 그릇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주고받음만이 허용된 이들에게는 적당한 주고받음을 넘어선 권한과 책임, 자율성과 힘을 부여했을 때, 오히려 자신을 믿어준 이를 탓하기 시작한다. 세상이 나에게 자리를 안 주고, 기회를 주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세상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받은 기회를 "과분한 업무다"하며 징징 거리는데 모든 에너지를 썼다. 그랬기에 그들은 기회를 상실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징징거리는 소리에 신은 응답해 주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나이와 직급을 가리지 않고. 별 것도 아닌 것에 징징 거리는 이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조그만 상처로 세상이 떠나갈 듯 울어대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강인한 이들은 어지간한 고통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체력과 인내심이 있다. 그 어떤 사람도 징징거리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투덜투덜. 조금만 힘든 일을 만나면 투덜투덜. 그들에게는 그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신에게 기도한 것과 같다.
"이 자리는 내게 부적합하니 편하고 쉬운 일을 주세요."
그 기도에 신은 응답해 주었다. 더 쉽고 더 적은 책임으로 살 수 있는 일. 더 하찮고 더 중요하지 않은 일.
빼앗긴 기회는 다른 도전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도전자들 중 몇몇은 앞선 징징이들과 똑같이 징징거리면서 도망친다. 그들은 똑같이 말한다.
"생각한 것보다 너무 힘들어요."
신은 말한다.
"그래. 생각한 것보다 너무 힘들었구나. 그러면 너의 힘에 맡는 자리로 보내줄게."
신은 너그러이 그들의 위치를 낮은 곳으로 보내줄 것이다. 그들이 원했고, 그들이 기도한 바가 이뤄졌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를 그들이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