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여정

기록의 의의

2025. 6. 20.

by 한상훈
기억의 잔여물


인간은 본능적으로 장밋빛 보정으로 기억을 정돈한다. 괴로운 기억을 삭제하고 좋은 기억을 남긴다. 그것이 더 가성비 있고 정신 건강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 기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좋은 기억을 모조리 삭제하고 안 좋은 기억만 남기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대상에 대해 트라우마가 각인됐거나 기억하는 쪽이 이후의 행동에 더 유리한 경우에 해당한다. 폭력을 당한 기억을 유지하는 것은 이후 폭력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을 예측해 방어하고 도망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기억과 본능적 행동은 과도한 예민함으로 작동해 사람들과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기록은 이러한 기억의 편집을 보정하는 효과가 있다. 감정의 날 것을 정확하게 기록해 두는 것은 기억 보정으로 생기는 부작용은 줄이는 것이다. 혹자는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생생한 고통의 기록을 적어두는 것은 오히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해 괴롭지 않겠는가?" 일리 있는 말이지만 내 경우에는 달랐다. 기록을 하면서 기억을 덜어냈다. 더 이상 마음에 기억될 것들이, 생각 속에 떠다니며 반복적으로 나를 괴롭혔던 잔상들을 제거했다. 언제든 기록을 다시 본다면 그때의 고통이 동기화되겠지만, 기록을 하면서 기억에서는 말소시킨다. 아주 많은 부분이 사라지기 때문에 오히려 잊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기억이 없고 기록이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 스스로가 나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점이다. 나는 내 지난 세월의 일정 부분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떠올려봐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든 과거의 기억을 동기화할 수 있다. 바로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20대는 그랬다. 아픈 기억들이 많다 보니 이 기억들에 좌초되어 살기보다는 기록을 하고 잊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어린 시절도 그렇다.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기억이 아닌 기록으로 상처도 기쁨도 다 이전시켜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나는 온전히 현재에만 집중하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과거에 대한 아쉬움도 기쁨도 크게 없다. 오로지 현재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와 미래일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그것을 위해 전력으로 달려 나가는 질주의 쾌감이 있다. 끝없이 고민하며 학습하고 계속 분석하며 미래를 설계해 나간다. 지난 인생 중 지금과 같은 시간은 거의 없었다. 스케치북을 새로 사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만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엔 내 크레파스의 색이 몇 개 없었는데, 지금은 색이 다채롭게 있는 크레파스 세트가 됐다는 점이다.


무기가 많아졌다. 나는 개발로는 27살 이후로 내 실력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 사업도 그렇고 세상에 대한 이해도 그렇다.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아도 계속해서 책을 읽고 공부하고 아무도 관심 없는 분야를 탐구하고 비밀을 파헤쳤다. 덕분에 손에는 흙이 가득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런 흙먼지를 싫어하지 않았다. 다들 깨끗한 곳에서 정돈된 식사를 할 때 땅굴을 파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비밀을 찾아내며 그 안에 있는 보물들을 건져 올리는 것은 나만이 가진 즐거운 비밀이다.


나의 기록은 그런 의미다. 과거는 과거일 뿐 그 이상 그 이하의 흔적의 가치가 없다. 종종 어떤 이들은 가족에 대해서 전 연인에 대해서 과도한 프리즘을 가지고 분노하거나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관계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일정 비율로 섞여있다. 순도 100%로 악인과 순도 100%로 선인은 매우 드물다.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 체계는 누군가가 미우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나쁘다고 해야 인식하기 편하다. 그에게 동정심을 품기보다는, 그와 좋은 추억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기보다는 모조리 지워서 그 사람을 악마화해야만 더 편하게 그를 미워할 수 있다. 그가 해준 희생도 헌신도 나의 편리함을 위해서 악인으로 프레임을 찍는 것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도 미운 사람이 많고, 고마운 사람도 많지만 아무리 미운 사람도 온전히 미운 짓만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때로는 그 사람 덕분에 웃었고, 즐거웠고, 감사했다. 반면 고마운 사람, 사랑했던 사람도 똑같다. 그 사람 때문에 괴롭고, 슬펐고, 외롭기도 했었다. 무시받았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 시절 그대로 온전히 기억하고 싶다. 온전히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다. 기록에는 힘이 있어서 마치 향을 맡으면 기억이 소생되는 것처럼 진솔하게, 날 것 그대로 적힌 기록은 살점을 뜯어내는 것처럼 아플 때가 있지만 덕분에 선명하게 나를 그 시점, 그 자리로 회귀하게 만들곤 한다.


기억에서 자유롭기 위해 기록할 수 있다. 감정에서 자유롭기 위해 기록이 의미 있다. 인간은 기억을 왜곡한다. 자신을 위해서. 남을 나쁘게. 남을 좋게. 원하는 대로 포장하고, 원하는 대로 다시 기억한다.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오염되어 간다.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기억은 기록으로 묻고, 나의 현재에만 몰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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