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여정

비가 오는 꿈

2025. 6. 21.

by 한상훈

오늘 꿈에서 나는 첫사랑을 만났다.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꿈속에서 보낸 시간은 마치 지금도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꺼려할 만한 일을 구했다. 그게 못 마땅했지만 꿈속의 나는 제지하지 못했다. 이런 일 하지 말고 그냥 나랑 살자 이렇게 말할 배짱도 없었던 것 같다.


종종 꿈을 통해서 현실을 더 선명하게 깨닫는 날이 있었다. 현실이 시궁창 같은 날에는 꿈속에서도 똑같이 행동했다. 똑같이 돈에 쪼들려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곤 했다. 그러면 꿈에서 깨어나서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곤 했다. '얼마나 돈에 쪼들렸으면 꿈속에서까지 똑같이 구냐.'


해결되지 않은 괴로움은 정신을 좀먹는다. 좀 먹힌 정신은 일상도 파괴한다. 청소를 할 수 있지만 청소를 할 기력과 의지를 상실해 생활하는 공간이 더러워진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할 수는 있지만 따뜻한 말을 할 생각도 여유도 상실한다. 자신이 가진 문제가 너무 커져버려서 충분히 의미 있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까지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좌초된다.


우울증 환자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렇다. 남들 눈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까지 내려간 것이다. 나 역시 비슷한 상황에 여러 번 놓였었다. 어린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좌절감이 컸을 때, 그리고 사업을 하면서 순식간에 불어간 빚들을 경험했을 때.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부적으로는 동작 불능이 발생하게 된다. 모든 에너지가 방전되어 버렸는지 충전기에 꽂아두어도 충전이 이뤄지지 않는다. 하루 종일 누워있어도 배터리가 계속 빨간불인 것과 같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서 건강한 삶이 어떤 것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만 적어도 사랑하는 것들을 지킬 수 있는지 많이 생각해 본 것 같다. 한 번은 고향 집에 머물면서 제품을 만들 때 꿨던 꿈이 있다. 그때 나는 수중에 여유도 없고,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을 보낼 때였다. 힘들고 외롭게 제품을 만들면서도 성공하리라는 신념만을 가지고 살아왔었는데, 꿈속에서 우리 집에 깡패들이 들어왔다. 무자비하게 부모님을 패고, 집안의 물건을 파괴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깡패들을 주먹으로 상대할 수도 없었고, 그들을 회유할 금전도 없었고, 부모님을 지킬 배짱도 없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여러 가지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지금 누리는 당연해 보이는 소중한 것들도. 소중한 사람도 최악의 상황에서 지킬 방도가 없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인 것이다. 성공. 성공만이 해답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우중충한 날에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못할지라도 내가 택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지.


그러고 보면 꿈속에서는 비가 내리는 꿈을 경험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손 발이 축축하게 물에 젖었던 감촉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꿈속에서는 어쩌면 힌트를 줬나 보다. 이곳은 아무리 이상한 일이 생기고, 끔찍한 일이 펼쳐져도 비는 내리지 않아. 적어도 너의 꿈속에서는 말이야.


꿈에서 깨어난 오늘은 꿈속에서 본 흐린 날처럼, 비는 오지 않고 먹먹한 물을 머금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현실에서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 현실이 꿈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있는 이곳도 누군가의 꿈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이 누군가의 꿈이었다면, 그가 꿈에서 깨어날 때 붙잡고 있던 고이고이 잡아둔 상념들도 해방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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