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여정

2025. 6. 21.

by 한상훈

나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어린 시절 내내 부재했다. 아주 오랫동안 의미 없는 싸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른들의 싸움 소리. 먹을 거라곤 없는 집. 치매 걸린 할머니. 저녁에나 오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외하면 텅 빈 동네. 할 게 없어서 켜둔 TV에서는 끝없이 반복되는 니켈로디언 만화들. 똑같은 에피소드를 몇 번을 봤는지 모든 스토리를 외워버릴 것 같았다.


그러던 날에 희망이 되어준 게 기독교였고 그랬기에 전심으로 믿었다. 내가 얼마나 전심으로 믿었는지는 내가 살아온 길이 증명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도 진심으로 믿었기에 기독교가 감추고 싶었던 것들까지도 알게 되었다. 결국 기독교가 가진 희망의 메시지를 넘어 그 안에 심연까지 보게 된 것 같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많은 가르침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부분이 많다. 그렇기에 나 역시 그것들 중 다수를 신의 메시지라 여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체를 구조적으로 파악해 보다 보면 연속적이지 않고, 모순된 내용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부터 신학을 배웠다는 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나에게 가르치려 하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주장은 과거 수백 년이나 이어져온 똑같은 레퍼토리 내에서 반복적으로 재귀되는 메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답이 없는 결론에 대해 메아리와 같은 말들을 반복했던 것이다.


그런 부분은 성경의 구조를 보면 알 수 있다. 크게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구약이 끝나고 아무런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는 약 400년가량의 시간이 지나 세례 요한이 나타나 예수의 임재를 예배했다. 이것이 여러 구약의 후반부에 기록된 여러 예언자들의 예언을 달성한 것이라 표현되곤 한다.


그렇게 구조를 나눠보면 모세가 지었다고 알려진 모세오경부터 해서 모세 이후의 사사들의 이야기가 담긴 부분이 있고, 다윗왕과 솔로몬 왕 등이 지은 찬양과 지혜의 서적이 있고. 이사야, 엘리야 등의 예언자들의 이야기와 바빌론 유수 시절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이야기로 구약은 구성된다. 그러고 나서 수백 년 후가 예수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의 이야기를 담은 대표적인 4 복음서를 지나 제자들의 서적과 편지를 지나 마지막으로 바울이 완성한 대부분의 개신교 교리로 완성된다. 그래서 정확히는 기독교 중에서 개신교는 바울이 완성한 교리를 따른다 볼 수 있다. 마치 가장 최신 버전의 업데이트가 기준이 되는 것처럼 앞서 나온 모든 율법을 덮어쓰는 최신 버전의 교리로 바울의 메시지를 가장 많이 택한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성경에는 일관성이 없다. 왜 일관성이 없을까. 지금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비판하는 기복신앙이라는 말이 있다. 복을 얻기 위해 믿는 활동을 비판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세오경에 담긴 메시지는 전형적인 기복신앙의 내용뿐이다. "네가 OOO 하면 복을 받아 장수하게 되리라."와 같은 온갖 조건에 따른 축복의 메시지로만 가득하다. 그렇다면 사후 세계는 어떨까. 안타깝게도 구약 성서가 기록된 대부분의 기록에서 사후 세계는 지금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불타는 지옥 같은 개념이 없었다.


종종 다니엘서 12장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확히는 구약에서 나온 사후 세계는 악인과 의인이 모두 같은 스올에 가서 모두 평안히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나온다. 이상하지 않은가. 사후 세계와 같이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그 대단한 모세를 통해서도, 골리앗 앞에 당당히 나아간 다윗 왕을 통해서도 전혀 들은 바가 없다. 다윗의 경우에는 악인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신에게 괴로움을 느껴 울부짖곤 하지만 언젠가 신이 심판하신다는 말만 하면서 사후 세계를 통해 벌을 내린다는 메시지 같은 건 일절 나타나지 않는다.


그뿐일까. 다윗왕이 전쟁을 치르며 싸우던 시절에 그는 율법을 따르며 살았지만 납득할 수 없었다. 복을 받고 형통하고 한다는 축복의 메시지가 있었지만 그의 삶은 수많은 역경의 역사였다. 율법에서 나온 내용이 고작 다윗왕의 세대에 가면 달라진다. 다윗뿐만 아니라 이후 나오는 모든 예언자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대로면 선한 이들이 복을 받아 잘 살아야 하는데 괴로움 속에 살다 끝나고 오히려 악인들이 형통한 모습을 보며 고통스러워한다. 율법은 고작 모세 오경이 나오고 나서 구약이 끝나기도 전에 수많은 예언자들에게 도전받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신은 한 번도 영원한 불지옥 같은 개념을 말하면서 악인들이 영원한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경전을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듯 들어온 유대인들과 그것만이 모든 법 위의 법이라 배운 이들에게는 예수의 메시지는 도전적이고 두려운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재밌는 것은 예수의 메시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따르는 자들에 대해 복을 준다는 메시지가 이제는 더 달라진다. 이제는 의로운 사람들은 살아서 고난을 받고 영광이 영원한 것이라는 내용을 치환돼서 전파된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성경의 앞에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그러니 영원한 영광에 대한 이야기도 없이 그저 살아서 복을 받아 번성하고 부유하게 되리라고 했으나 정작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동안 번성하고 부유하기는커녕 가장 신실한 이들이 고난 받아 도저히 못하겠다고 울부짖는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 이후엔 살아서 복이 아닌 먼 훗날 영원한 영광으로 또 다른 이야기로 나아간다.


개신교의 문제점은 이러한 비연속성에 대해서 합리화하는 수백 가지 자신들만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수많은 목사들과 이야기해 보았지만 그들 각각이 생각하는 답은 다 달랐다. 애초에 교리가 만들어짐에 있어서 수많은 모순이 있었고 그 모순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덮었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정말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구약 수천 년 동안 침묵했던 신이 정작 예수도 아닌 바울의 편지를 통해 전달된 내용이 교리의 대부분이 되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선 글에서도 종종 언급했던 내용이 이러한 일관성 없는 내용에 대해 신학을 말하는 이들은 "한 명의 화자"가 말하는 것 같다는 표현을 종종 한다. 사실 그렇지 않다. 성경의 내용을 보다 보면 엉뚱한 내용이 갑자기 삽입되어 다른 화자가 참견한 것 같은 부분들이 나타나곤 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브니엘에서 천사와 싸운 일화이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해당 구절은 아주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추가된 구절일 것이라 보는 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기독교가 감추고 싶은 것들을 기독교의 입장에서 오랫동안 들어왔기에 나는 반대로 유대교의 입장과 이슬람교의 입장도 오랜 시간을 들여 들어보았고 찾아보았다. 각 종교에는 그들이 믿는 수많은 이유와 근거가 있고, 그 과정 속에서는 결국 믿음은 취사선택이 반영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몇몇 논쟁적 주제에 대해 "나는 이렇게 믿어."라고 하는 자신의 선택이 반영된 것일 뿐 선택을 했다고 해서 반대 의견이 부당한 주장이거나 비합리적 주장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종교의 광기에 미친 이들은 반대 의견을 종종 사탄의 의견이나 미혹하는 자의 이야기라 쉽게 잘라 말하곤 한다.


나는 기독교의 많은 부분에 인간적 개입과 모순이 오롯이 담겨 있으리라 생각한다. 종종 사람들은 성경의 순수성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정작 성경은 번역본에 따라 원문을 심하게 훼손한 경우가 태반이며,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생겨난 잘못된 해석과 교리로 인해 교단이 갈리는 것이 수백 개가 넘는다. 미국에 비하면 1/100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남한땅에서도 200개 이상의 교단이 자신들이 정답이라 말하며 섞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믿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글을 쓰지만 정작 나는 신을 진정으로 찾고 있다. 신을 찾는 이유는 내 삶의 목적이 부재했기 때문이고,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삶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 그랬기에 나는 온전히 신이 없다고 보지도 않고 오히려 변증론적으로 신은 존재했다고 믿는다. 아직까지 개신교와 기독교의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왜 신을 존재한다고 믿는 것일까 하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여러 목적 달성을 위해 자신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교리를 만들거나 교단을 만들고 메시지를 이용해 왔다. 유구한 역사였다. 초기 기독교는 동방정교와 가톨릭으로 나뉘고, 그렇게 나눠지고 나눠지면서 결국 이것을 나누고 이용하고, 편집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메시지를 프로파간다처럼 교인들에게 학습시키곤 했다. 결과적으로 서로가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유야무야 넘어간다.


나는 신이 있기를 바라고 그 메시지가 성경에 담겨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메시지의 많은 부분은 훼손됐고, 그랬기에 그것을 온전히 따르거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온전히 믿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생각한다. 나는 주체적으로 신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노력한다. 인간은 신을 이용하기 위해 신을 섬기는 척을 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신을 섬기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고, 내 몸을 헌신해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개신교에서 가장 큰 계명은 이미 예수님이 다 전달했고 그것에 힘써야 하지만 정작 종교를 따르는 이들은 메시지가 아닌 행위에 집착하며 여러 프레임을 두고 신을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존재인 듯 행동한다.


오만하게 기도한다. 광장에 서서 "OOO 해주시옵소서!" 당당히 외치곤 한다. 목소리를 크게 내어라라는 말씀은 나도 기억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진짜 금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절은 이사야서 58장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식을 한다며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원하는 금식을 하는 이가 없어 통탄하는 내용이다. 신을 위한다면서 왜 자신을 위한 것에만 기도하고 울부짖는 것인가? 의로움을 위해 싸우고, 상처받고, 자신이 굶고 타인을 배부르게 하는 일에는 왜 주저할까.


많은 목사들에 대해 내가 존경심을 상실한 것은 그들이 수많은 헌금과 넉넉함을 얻고도 그것을 모두 내어 사람들을 구제하지도 못하며, 정말로 메시지가 필요한 곳에는 가져갈 의향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예수님이 그들을 본다면 천국 문에서 돌려보내실 것이다. 왜?


"많은 것을 받은 이가 많은 것을 행하지 않았다."

"악하고 불충한 종이다."


매달 수십, 수백억의 헌금이 쏟아지고 있는 곳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옳은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가진 것을 다 내놓아 향유로 발을 닦은 여인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위선으로 가득하고 자신들이 믿는 교리와 메시지에 대한 공격에 발끈하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닌 자신들이 가진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모욕이나 성경에 대한 모욕이 아닌 자신이 소중하게 쥐고 있는 권위에 대해 도전받으니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일 뿐 거룩한 분노도 선을 지키기 위함도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개신교의 출발을 기억해야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잊었다. 마르틴 루터가 개혁할 때 기존에 문제점을 비판하며 자신이 믿는 옳은 길을 주장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지만 동시에 반대한 이들도 있었기에 지금까지 분리되었다.


기독교는 교리가 완전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가 잘못된 것과 잘못 가르친 게 있다면 그 교리가 설령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낼지라도 그것을 밝히며, 회개하며 나아갔기 때문에 아직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선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이 완전하다고 누가 단언하겠는가. 수백 년이 지나 또 다른 마르틴 루터가 나타나 개혁하고, 그 개혁이 옳았다면 그전까지 잘못된 것들을 가르친 이들은 왜 틀린 것을 찾아내지 못했는가.


나는 개신교가 신처럼 떠받드는 바울의 말을 빌려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지금 믿고 있는 것들이 정말로 끝까지 믿어야 할 메시지인가. 아니면 내가 선 줄 알았으나 사실은 넘어진 사람이 아니었는가. 성경은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나 의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하였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이가 있고, 잘못된 것인지 모르나 선한 마음으로 전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배운 자가 침묵하며, 먼저 잘못을 깨달은 자가 여전히 잘못을 감추며 전한다면 그것은 "어린아이를 미혹하게 하는 죄"에 해당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이들은 돌을 목에 메어 스스로 바다에 빠지는 게 낫다 했다. 잘못된 가르침이 그토록 무겁다는 것이다.


아는 것과 실천은 놀랍도록 다르고, 아는 것이 정말로 아는 것인지 깨닫는 과정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이 길 끝에 내가 무엇을 발견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신을 찾고 싶고 여전히 신이 어딘가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찾아다니는 중이다. 만약 신이 내가 바라는 모습이라면, 인의를 사랑하며, 진실함과 의인에게 보상하는 분이라면 내가 설령 흔들리며 나아가는 와중에라도 이 길을 좋게 봐주시리라. 가르침에 대해 가졌던 오랜 물음이 급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선명한 글자처럼 마음속에 떠오르리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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