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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여정

가스펠

2025. 7. 10.

by 한상훈

나는 잘 때 되도록 수면 안대를 쓰는 편이다. 의도적인 어둠이 수면의 농도를 높여준다 생각한다. 내가 머물고 있는 강남은 한 밤 중이라도 종종 시끄러워지고, 가만히 있어도 밝다 보니 안대를 쓰는 게 적절한 방법이다.


암막 커튼을 써본 적도 있다. 양재에 살 때는 암막 커튼을 썼는데, 암막 커튼의 문제는 날이 밝아오는 게 도저히 감지가 안된다는 점이다. 밖과 너무나도 실내를 차단하는 느낌이 들어 암막 커튼은 이젠 쓰지 않는다. 블라인드에 필요에 따라 수면 안대. 경우에 따라선 귀마개를 끼고 자기도 한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을 때. 그런 날이 아주 가끔 있다.


오늘도 자려고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예전에 보려고 했던 가스펠 스타일의 피아노 연주법에 대한 영상을 틀어두고 수면 안대를 썼다. 영상은 해외 피아니스트의 영상이다.


The Styles of Gospel, with Damien Sneed


꽤 오래전부터 여러 번 본 영상인데 매번 봐도 비슷한 스타일로 어떻게 쳐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영상을 들으면서 누워있다 보니 예전에 만났던 여자친구가 기억났다. 내가 고백해서 만났던 여자친구들은 헤어진 후에 거의 생각도 나지 않고, 딱히 그리운 마음도 없지만 그녀만은 달랐다. 그녀의 독특한 성장 배경도 있거니와 아직까지 만났던 여자친구들 중 가장 순수하고 여린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떠나 혼자 살았다고 했다. 소위 말하는 가출 청소년. 덕분에 평범한 인생에서 겪어야 할 일들 보다는 안 좋은 경험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항상 그렇지만 사람은 유유상종으로 만나게 되나 보다. 나를 좋아하는 이들은 언제나 나처럼 어린 시절이 어떤 형태로든 힘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녀와 내가 차이가 있다면 나는 가출을 하기보다는 그냥 마지못해 살았었고, 그 과정에서 종교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 부단히 애썼다는 점이다. 반면 그녀는 집을 나왔으니 온갖 일들을 해야 했고, 그녀에게 있어 삶의 의미는 분명 내가 고민했던 삶의 의미와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가출해 부모와의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 편으로는 내가 만났던 여자 중 가장 순수했던 친구를 보면서 나는 여러 감정이 들었다. 그녀와 헤어진 이유도 특별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지만 아주 깊게 좋아하진 않았었다. 반면 그녀는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스스로가 부족하다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녀의 눈에는 그 당시 내가 무척이나 대단해 보였나 보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대단한 사람이 아닌 그저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일 뿐이었다. 만약 내가 그녀의 몸으로 살아야 했다면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자신은 없다.


내가 성경에서 좋아하는 부분은 예수의 이야기도 아니고, 모세의 이야기도 아니다. 구약의 후반부에 나오는 선지자와 예언자들의 이야기다. 왜 그 부분을 좋아할까. 그들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인물들이었다. 수백 명의 이교도들과 상대한 엘리야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단 2명밖에 없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수백 명의 이교도들을 기적으로 몰살시키며 신의 사자임을 증명한 엘리야도 그를 죽이겠다는 이들 앞에서는 지쳐 무력해졌다.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 열왕기상 19장 4절


엘리야뿐만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의 삶은 고난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찾아와 지혜를 얻고, 예언을 받으며, 기적을 보고, 천사를 본 듯 대하지만 정작 그들의 생애는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며, 끝없는 죄악을 저지르는 왕과 백성들, 그리고 악인들의 득세를 지켜보아야 했다.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는 신이 정작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방관하는 것처럼 보이니 분노하고, 절망하고, 무기력해지며, 때로는 더 이상 못하겠다며 죽여달라 간청하기까지 했다.


강인해 보이는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 세상의 기준으로 대단한 업적을 이룬 이들. 그들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해 보이고, 걱정이 없어 보이고, 능력 있어 보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인간일 뿐. 만약 서로의 입장이 바뀌어, 서로의 영혼이 바뀌어 태어났다면, 누가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갔을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나를 좋게 봐준 여자친구의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만약 그녀의 삶을 살았고, 그녀가 내 삶을 살았더라면, 그녀가 나보다 몇 십배 더 위대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법이다.


나에게 있어서 가스펠, 복음이라는 것은 이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고, 그 시간이 다하면 그 어떤 것도 쥐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간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가지고 태어난 게 없으니 아무것도 챙겨가지 못하고 떠난다. 서로의 삶에 대해서 위대함과 천함을 말할 수 없다. 그저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


예수님의 이야기 중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이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낸 헌금은 두 렙돈이었다. 현실로 비유하자면 가장 낮은 지폐인 천 원짜리 2장 정도인 셈이다. 반면 부자는 많은 헌금을 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 마가복음 12장 41~44절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이보다 본질적으로 더 위대하다 천하다 말할 수 없다. 그가 어떤 DNA를 가지고, 어떤 기질을 부모에게 물려받았으며, 어떤 환경과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왔는지, 내가 그 입장이 되어 살아보기 전까지는 우열을 따질 수 없다. 우열을 따질 수 있는 게 있다면 현재뿐이다. 현재의 선택. 나의 DNA와 기억과 환경을 모두 물려받은 내가 100명, 1000명이 있다고 가정할 때, 동일한 순간을 경험할 때 나는 그 수많은 내가 선택한 것보다 더 위대한 선택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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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에서 설계자와 만난 네오가 완전한 예다. 설계자의 방에 있는 수많은 TV는 네오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들을 보여준다. 분명 네오는 TV 속 대부분의 네오처럼 분노하고, 욕을 하고, 부정하고, 화를 낼 수도 있었다. 반면 네오는 수만 가지의 네오들이 하는 평범한 수준의 선택이 아닌 위대한 선택을 했다.


위대함이라는 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다. 개인의 기준으로만 측정될 수 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수백 가지 선택 중 가장 위대한 선택은 무엇인가. 신도 감탄할 만큼 가장 위대한 선택은 무엇일까. 가장 담대한 행동은 무엇일까. 가장 인간적이면서, 책임감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


만약 내가 가진 기준을 그녀가 알고 있었다면 그녀는 나를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업가로 보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해보려 애쓰는 한 남자로 봤을 것 같다. 그리고 난 그게 더 좋다. 나를 좋게 봐주는 이들이 종종 있지만 그런 시선을 받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나는 내게 주어진 육체와 환경을 바탕으로 여기까지 온 것일 뿐, 만약 나를 좋게 봐주는 이들이 내 삶을 대신 살았다면 몇 배는 더 멋진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법이다.


이 모든 것이 끝나면 고향 땅으로 돌아갈 때가 올 텐데, 나는 그곳에 많은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다. 육신의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영혼대 영혼으로 만난다면 우열을 어떻게 나누겠는가. 그 많은 재산? 지식?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영원의 관점에서 인간 삶의 시절동안 누리는 것은 찰나의 환상적인 순간일 뿐. 나는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지금 가진 젊음이나 시간이나 재능은 불과 5년, 10년이 지나면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20년이 지나면 어떨까. 30년이 지나면 어떨까. 아무도 모르는 법.


진정으로 위대한 선택은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며, 경쟁 대상은 타인이 아닌 수많은 나일뿐이다.


'최고의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1000명의 내가 있다면, 그중 가장 현명한 나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반면 1000명의 내가 있다면, 그중 가장 미련한 나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그녀가 이 글을 볼지 안 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그녀보다 잘났다 생각한 적도 없고, 오히려 슬픈 시간을 홀로 이겨내기 위해 애썼던 시간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녀에게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했으리라. 나도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현재의 모습과 삶의 방식은 다를지라도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도 참 애썼더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영원한 친구를 만드느냐'일뿐이다. 허상과 같은 친구, 관계, 일, 아무 짝에도 쓸모도 없고 관심도 없다. 내가 기필코 사지를 향해 가려는 이유도 선명하다. 나는 이 세상이 끝나고 났을 때, 내가 이곳을 떠나는 날이 왔을 때. 나의 죽음이 왔을 때.


그곳에 나를 기다려주는 이가 많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싶은 사람이 많은 삶을 살고 싶다. 그게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삶의 이유이자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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