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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Nov 05. 2020

[에세이] 동기부여

좋아하는 일에는 동기부여가 필요없던거 같아

2014년 12월 크리스마스가 기억납니다. 


저는 교회 학생들, 아이들을 모아 크리스마스 행사 때 공개할 10분짜리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영상 이름은 "내일의 팔씨름왕"이었습니다. 스토리는 "고통받는 영웅이 강해져서 악당을 물리친다는 클리셰"를 따랐습니다.


1. 친구들을 괴롭히는 악당

2. 악당에게 쉽게 당하는 주인공

3. 강해지기 위해서 스승을 찾아가는 주인공

4. 혹독한 훈련을 받는 주인공

5. 강해져서 돌아온 주인공

6. 승부를 가리기 위해 팔씨름 대결을 함

7. 승리 후 평화를 되찾고 모두와 친구가 되며 마무리


네이버 클라우드에 저장한 촬영 영상들(배우들의 얼굴이 나오다보니 모두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

이 영상을 위해서 대본을 쓰고, 배우들의 표정과 행동을 상상하고, 촬영하는 일 모두 무척 즐거웠습니다. 배우로 나온 학생들 중 몇몇은 부끄러워했고, 몇몇은 매우 능숙하게 연기를 해줬습니다. 같이 웃고 떠들면서 촬영을 하고, 같이 찍은 영상도 보면서 많이 웃었습니다.


이후 집에 돌아와서 저는 촬영한 영상을 하나하나 편집해봤습니다. 이때 컴퓨터가 썩 좋지 않아서 에러가 나곤 했습니다.

2014년 12월 경 찍은 사진

위의 사진은 제 인생 처음 프리미어를 썼을 때 만난 에러입니다. 집에 컴퓨터로는 렌더링 과정 중 멈추거나, 에러가 나서 프로그램이 종료되는걸 몇 번 반복했습니다. 편집한 파일을 옮길 수도 없었기에 저는 영상을 모두 클라우드에 넣어, 피씨방에 갔습니다.


아침 일찍 피씨방에 가서 프리미어를 설치해 12시간 가까이 영상을 편집했습니다. 렌더링 자체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중간 중간 효과음, 배경음, 자막 등을 맞추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루종일을 했음에도 영상의 절반 정도밖에 편집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너무너무 재밌어서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편집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날 조카를 돌보기 위해 부천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당연히 조카를 돌보고, 컴퓨터 환경도 없었기 때문에 편집을 할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배경음을 살펴보고, 컷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 음악하고 어떻게 맞춰야 할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무척 재밌었습니다. 


얼마나 이 일이 재밌었는지 저는 10분짜리 영상에 24시간 동안 편집을 하고, 중간에 렌더링 실패를 수 없이 겪고, 크리스마스 행사 당일이 되서야 렌더링을 완료해서 영상을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뜬금없이 팔씨름을 주제로 영상을 공개한다는게 무척 이상한 일이었지만 보신 분들은 무척 재밌어하셨습니다. 저 역시 너무너무 즐거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느꼈던 건 정말 즐겁고, 하고 싶은 일에는 아무런 동기 부여가 필요 없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학생들과 동생들의 연기를 촬영하고,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면서 담은 순간들을 편집하는 일에는 동기부여가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일 자체가 너무나 큰 행복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대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서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내 옷을 내가 만들어 입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여러 아이디어가 뇌를 채우고, 디자이너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디자이너 친구에게 아이디어를 설명하며 그린 그림 

저는 서울로 올라가 동아리 형님들에게 조언을 구해 옷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당시 제가 속한 동아리는 기독교 단체였지만 의류 분야에서 일하시는 형들이 꽤 많았습니다.) 티셔츠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공정이 필요한지, 자본은 얼마가 필요한지, 배송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등 하나하나 조언을 들으면서 저는 사업을 준비했습니다.


스마트폰이 뜨거워질 정도로 여러 형들에게 전화를 하고, 사장님들에게 전화를 걸어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이때가 2014년 7~8월 경이었습니다. 한 여름에 저는 돈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지만 전화를 하며 발로 뛰던 그 날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심지어 저는 티셔츠 만 장을 팔아 개인 최초로 인공위성을 띄운 송호준님에게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는데, 여전히 그 순간을 생각하면 이불킥을 하곤 합니다.


당시 저는 과도하게 큰 자신감으로 메일을 썼는데, 얼굴이 90%는 차지하는 초근접 셀카를 첨부파일도 아니고 바로 보이는 이미지로 해서 송호준님께 보냈습니다. 그때 제가 했던 말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물어보는건 예의가 아닌거 같아서 얼굴 사진을 보냅니다." 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도 참 실례였습니다.


패션 브랜드 '매드크래프터' 준비하던 시절 스케치한 로고




반면 해야하는 일이지만 언제나 지쳤던 것도 많습니다. 대학시절 공부가 그랬습니다. 막상 공부를 많이 하지도 않으면서 하는 척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괜히 논문이나 노트 정리한걸 펼쳐두고 인증샷을 찍고, 카페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페이스북에 올리곤 했습니다.



공부 자체에서 동기부여를 얻지 못하니 저는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에서 동기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노트 정리한 것, 공부한 것, 애쓰고 있다는 것 등을 보여주기 바빴습니다. 이렇게 공부를 할 때는 집중해 공부를 해도 만족이 적었고,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좋아하는 일을 대학 때 공부했다면, 그것을 일로 삼았다면 더 행복하게 시간을 보냈을텐데...' 하며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저는 보여주기에 급급할 때가 있습니다. 일 자체보다 일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여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일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여기저기 방황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사람이 언제나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즐겁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하면서, 그 안에서 행복을 풍성히 즐기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그것이 사람 사이에서 얻는 행복이건 결과물에서 얻는 뿌듯함이건.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방법과 크기는 모두 다를 겁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할 때엔 온 몸에서 에너지가 넘치고, 하면 할 수록 재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지금 만약 지치고 힘들어서 더이상 못 나갈 것 같다면, 어쩌면 그건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길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좋은 친구는 언제 만나도 즐겁고 편안하듯,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할 때엔 그때가 언제라도 나는 즐겁고, 편안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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