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고등학교 3학년 때 기흉 수술을 했다. 수술을 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5월의 어느 날 나는 토요일 저녁에 농구 코트에 갔다. 농구 코트에 가면서 전설적인 NBA 선수인 코비 브라이언트를 생각했다. 그는 NBA 내에서도 지독한 연습벌레로 알려진 선수다. 나는 그의 훈련법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었다. 그의 훈련법 중 하나인 매일 1000개의 슛을 넣는 것(쏘는 게 아닌 넣는 것)을 하고 싶었고, 그대로 시도했다. 저녁부터 시작해서 밤이 되도록 던져도 1000개는 되지도 않았고, 나는 버스 막차를 타기 위해 500개로 목표를 수정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날에도 나는 코트에 나갔다. 어제 못 성공한 것을 오늘은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공을 3개쯤 던졌을 때 가슴에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 맺혔다. 너무 아파서 오른손으로는 심장 쪽을 쥐어잡았고, 왼팔은 꼼짝도 못 할 것 같았다. 나는 학교로 쩔둑 거리면서 갔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갈 수 있었다.
기흉 수술은 폐포가 터지면서 공기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공기가 찬 병이다. 공기를 빼기 위해서 가슴에 구멍을 내고, 긴 호스를 꽂아 공기를 빼낸다. 수술을 하고 나니 가슴엔 관이 연결됐고, 관은 이상한 기계 상자와 연결돼있었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관을 꼬이지 않게 해서 상자랑 링거를 끌고 가야 했다. 하루는 친구들이 놀러 왔는데 얼굴이 많이 엉망이었나 보다. 얼굴은 황달과 간 수치 때문에 시커멓고 누랬다. 머리는 감지 못하니 기름을 바른 것 마냥 떡져있고, 폐에는 관이 꽂혀서 기계를 끌고 다니고 있었다. 친구들 말로는 죽을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렇게 몇 주 고생하고, 집에서 쉬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기흉은 끝이 아니었다. 병원에서는 결핵이 의심된다고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다. 약 3~4주가량을 학교에 가지도 않고, 병원과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 편하게 지내면서, 공부도 하고, 농구도 여전히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결핵약이다. 보건소에서 준 결핵약은 특별히 맛이 거북 한 건 아니었지만 먹고 나면 조금 피곤한 것과 오줌이 피처럼 붉게 나온다는 단점이 있었다. 친구들이랑 같이 화장실을 가면 항상 피 같은 오줌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게 귀찮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몇 주만에 학교에 돌아오자 다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는 둥의 소문이 돌았다고 친구들이 말해줬다. 한 여자애는 나 때문에 결핵이 혹시 옮았나 반 전체가 피검사를 했다면서 팔에 주사 자국이 생겼다고 했다.
그때의 수술로 나는 잃은 게 많았다. 수술을 하고 몇 개월 뒤에 CT를 찍게 됐는데 숨을 15초도 참지 못할 정도로 폐활량은 약해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조금만 몸이 안 좋거나, 큰 소리를 듣거나, MP3를 오래 들으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병원에 다시 가봤지만 원래 그렇다면서 실제로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니 돌아가라고 했다. 꽤 큰 병원이었는데 그 뒤로는 그 병원을 믿지 못하게 됐다.
폐가 다친 후에 운동 능력이 많이 떨어졌다. 몇 개월 동안 먹은 결핵약도 내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준거 같진 않다. 농구팀에서 주장도 하고, 우승도 시켜봤는데 달리기, 숨 참기 같은 모든 능력이 떨어졌다. 수년간 코트를 그렇게 뛰었는데 이제는 3km를 25분 정도에 뛰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훈련했던 그 날을 후회해본 기억이 전혀 없다. 도리어 나는 언제나 자랑스럽게 이 이야기를 하곤 했다. 정말 강해지고 싶었으니까. 정말 존경하는 선수를 닮고 싶었으니까 나는 열심히 했던 것이라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가 없다. 나는 고등학생 때 내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가 없다.
어쩌면 그때 아프지 않고 더 공부했다면 서울대에 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몸도 더 건강하게 지금 살고 있을지 모르고, 여전히 잘 뛰어다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후회해본 적은 없다. 그 뒤로 나는 최선을 다해 공부했고, 계속 운동했다. 그리고 전교 300등을 올려 1등으로 졸업했고, 졸업식 때 상과 장학금도 받았고, 국가 이공계 장학생에 뽑혀 장학금도 받았다.
수능이 끝나고 나서 폐를 되돌리기 위해서 수영장에 다녔다. 폐활량이 엉망이 된 상태라 움파 움파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하지만 수영장 회원권이 끝날 때쯤에는 적어도 레일 끝까지는 어떻게 던 자유형으로 갈 수 있게 됐다.
요즘 나는 다시 뛰기 시작한다. 헬스장에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달리고 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5km 뛰는 데는 40분, 3km는 24분 정도 걸렸다. 형편없는 기록이지만 그래도 뛰고 있다. 몇 달만 이렇게 뛴다면 과거보다 더 잘 뛸 수 있다. 이제는 회원권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헬스장이 1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예전처럼 온몸을 부술 듯 운동해선 안된다는 것도 배웠다.
최선을 다하고 최악의 결과가 나온 건 후회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언제나 부끄럽다. 창피하다. 나 자신에게 쪽팔린다.
나는 삶에 당당한 편이다. 실패한 것을 감추지도 않았고, 성공한 것을 감추지도 않는다. 그냥 솔직하게 나 자신을 담고 싶다. 그렇기에 부끄러운 삶을 담고 싶지 않다. 후회할 삶을 살고 싶지 않다. 현재 내가 믿는 최선을 따라 열심히 살고 싶다. 그러면 미래의 나를 마주할 때도 여전히 당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