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언제나 옳은 이’들에게서 받는 관심은 아무 쓸모가 없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설령 잘못했다고 해도 내 자신은 옳다고 여긴다. 언제나 그렇다.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버리면서도 옳다고 생각한다. 성매매를 하면서도 옳다고 생각한다. 하면 안 될 짓을 하면서도 옳다고 생각한다. 정작 그 모습을 누군가 지적하면 분노한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알고 있다. 본인이 틀렸다는 걸 알고 있는데, 지적당했기에 화가 난다. 그리고 몇몇은 아예 도덕을 포기하고 살기도 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처럼, 하나가 부서진 사람은 다른 많은 것도 부서져있곤 하다. 법 하나를 우습게 어기는 사람이 다른 법은 잘 지킬까. 자기 말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과의 약속은 잘 지킬까. 태반은 뻔하게 살아간다. 행동 하나를 보면 그의 모든 인생이 훤히 그려진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들을 괴롭히고, 불량하게 다니던 사람들이 결말이 뻔하고, 관리 없이 인생을 허비한 사람들의 현실이 뻔하다. 언제나 밖에 있는 것들을 탓하며 살아왔지만, 정작 자신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수의 사람들만 ‘내 생각이 틀렸을 수 있으니 조언을 들어야겠다.’라고 말한다.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인정하는 건 쉽지 않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분명 다르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분명 다르다.
니체의 철학에서 이를 넓은 의미로 그림자라 표현한다. 인간의 실존주의적 고통에 대해서 그림자라 말하는데, 그림자를 마주한 사람들은 자신이 틀렸고, 부족하고, 온갖 잘못된 인간이라는 걸 마주한다. 그림자를 마주하는 일은 고통을 마주하는 일이고,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과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약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고 싶기에 그들은 그림자를 마주하기보다 자신을 방어하기 급급하다. 자신의 인생이 시궁창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자신의 가족들을 파괴하고, 자신의 도덕과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음에도, 그림자를 마주하지 못한다. 언제나 자신은 옳아야 한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은 옳다고 주장하고 있겠지만 그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타인의 비판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분노하는가. 아니면 사과하는가. 발끈하는가, 천천히 생각해보는가.
‘언제나 옳은 이’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그들이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언제나 옳은 사람과 갈등이 생기면 나는 ‘언제나 틀린 사람’이 된다. 그렇다.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틀린 사람이 된다.
나는 ‘완전히 틀린 사람’이다. 내 안과 밖에는 수많은 모순이 존재하고, 거짓말도 하고, 오만함도 많다. 사람들에게 말하기 힘든 부끄러운 일들도 많고, 나를 떠벌린 적도 많다. 나는 틀린 사람이기에 나는 옳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 그들의 고결함을 나같은 틀린 사람이 받아들일 방법이 없다. 나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 없이, 약함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좋다. 잘못을 사과하는 사람이 좋다. 고개를 숙이고, 과거를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 좋다. 나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말하는 이들과 결이 다른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 ‘언제나 옳은 이’에게 아무런 관심도 받고 싶지 않다.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다. 그들이 나를 좋게 생각해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들이 나와 페이스북 친구를 끊고, 브런치 구독을 끊고, 인스타 팔로우를 끊고, 전화번호를 삭제하고, 차단하고, 카카오톡을 차단하고, 나를 같은 사람 취급해주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나를 같이 어울리지 못할 놈으로 봐주길 바라고 있다. 나는 그들과 달리 완전히 틀린 사람이기에 틀린 사람처럼 대해주길 바라고 있다. 제발 나를 틀린 사람으로, 멸시해주길 바라고 있다.
나는 틀린 사람이다. 부족한 사람이다. 그러니 나를 무시해주길 바란다. 그들의 삶에서 내가 지워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