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버린 재능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화학이 가장 어려웠다. 특히 탄소화합물에 대한 부분이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설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을 때 내가 택한 방법은 나 자신을 백지로 여기고 시작하는 것이었다.
문제집을 보면 나오는 객관식 문제에서 보기 5개 중에 아는 게 있는지 없는지를 체크했다. 만약에 모두 다 모른다면 그냥 답도 쓰지 않고 틀렸다고 체크를 했다. 틀린 표시를 큼지막하게 모두가 보도록 했다. 창피할 것도 없다. 모르는 건 지금 이 순간뿐이고, 며칠만 지나면 다 맞출 문제들이니.
모조리 다 틀리고, 모르는 문제랑 모든 보기에 대해 설명을 찾아 정리했다. '고작 고2 화학에 들어가는 내용이 어려워봤자 얼마나 어렵겠냐.'라는 마음가짐으로 며칠 동안 모조리 틀리는 것을 반복했다. 살면서 모든 페이지의 모든 문제를 연속으로 다 틀리는 경험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아쉽게도 3일 정도 연속으로 모든 탄소화합물 문제를 틀리다 보니 이후로는 개념을 이해하고 문제를 맞히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밌게도 내가 어려워했던 해당 부분을 기점으로 화학을 포기한 친구들이 많았다. 반면 나는 탄소화합물을 잘 이해했기에 졸업할 때까지 거의 화학 1,2등급을 놓치지 않았다.
문제가 어려우면 그만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뜻한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라 자신만 문제를 못 해결하는 것 같고, 자신만 바보 같고, 남들은 다 잘하는 것 같다 생각하곤 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 내가 못하는 것은 남들도 대부분 못하고, 잘하는 사람들은 그전부터 잘했더냐 특출 난 집안이거나, 그것만 유독 잘하고 나머지는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남들을 너무 대단하다 치켜세우며 자신을 바보로 몰아갈 필요가 없다. 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작은 문제를 수없이 해결하며 성장한 사람들이다. 인간은 기계와 비슷하게 정량적으로 일정한 노력과 집중력으로 꾸준함을 유지하면 필연적으로 성장한다. 그것이 운동이던 공부던 업무 지식이나 실력이던 모든 것이 그렇다.
그런 면에서 내가 느끼기에 가장 멍청한 사람은 '제대로 시도하지 않고서 자신은 못한다 단정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진심으로 자신의 가능성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낼 것이다. 좋은 신체를 가졌음에도, 좋은 환경을 가졌음에도 발현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재능만큼 안타까운 건 없다. 빛나는 인생을 바라는 것과 빛나는 인생을 사는 것이 다른 것처럼, 재능을 가진 것과 재능을 실현하는 것은 삶에 많은 차이를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