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초라하기에 마지막이 더욱 찬란하리
나는 간절히 목표한 것을 선명하게 이루며 살아왔다.
고등학생 시절 3년간 농구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꿈꿨다. 여름방학, 겨울방학, 1시간 넘게 드리블을 연습하고, 자유투를 연습했다. 농구대회 우승이라는 꿈을 꾸며 연습했다. 그렇게 연습한 3년이 지나고 3학년 여름, 교내 농구대회에서 나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주장으로 모든 경기에 선발로 나와 가장 친한 친구들과 함께 모든 팀을 압도적으로 이기고 우승했다.
고등학교 시절 두 번째 꿈인 졸업식 때 상을 받는 것 역시 이뤘다. 수능을 보고 기뻐하는 꿈도 이뤘다. 수능은 내가 본 모든 시험 중 최고 성적이었다. 가장 낮은 모의고사를 기준으로 150점을 올렸고, 9월 모평보다 20점 높였다. 수리 가형 1등급도 이뤘다. 평택시 전체에서 수년간 거의 없었던 점수였다.
대학에 오니 국가 이공계 장학생을 받았다. 수리 과학 전국 상위 1500명 정도만 받는 장학금이다. 대학생 때는 2번을 제외하고 6번 장학금을 받았다. 2번 못 받았을 때는 자퇴를 고려했던 1학년 가을학기와 2학년 봄학기였다.
자퇴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도 인생에서 후회할만한게 있다면 대학을 일찍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 기간동안 나는 배우고 싶던 건축을 맛보고,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성경을 몇 번을 쓰고 몇 번을 읽고, 기독교의 끝을 향해 나아간 것 같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들을 찾아다녔고, 대부분 만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24살 창업을 시작했다. 군대까지 1년의 시간 밖에 없었으므로 수익이 바로 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생계도 유지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프로그래밍을 했다. 단 6개월 만에 싱가포르에서 3억 원 규모의 투자 제안을 받았다. 포트폴리오를 보냈지만 군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투자를 유치하진 못했다. 그러나 가능성은 충분했다. 군대에서 무료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개발하다 제대하면 이것을 이용해 사업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병 3호봉 밖에 안됐을 때 이미 외국의 실리콘밸리의 개발자들과 유명 개발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군대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여러 난관을 만났다. 사람간의 어려움도 있었고, 결정적으로는 환경의 제약이 너무도 컸다. 하루 1시간 남짓한 컴퓨터 시간과 그마저도 좋지 않은 컴퓨터로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간 연등을 하머 독서실과 사이버지식정보방에서 공부하며 어려움 속에서 1년 넘게 만들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와 계속 진행한 사업이 잘 안 됐다. 돈을 수년간 거의 벌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이 없었다. 나는 남들보다 2배 이상의 강도로 일을 하고 있었고, 성장 곡선을 그린다면 몇 년 안에 모두를 역전할 것은 필연적이었다. 나정도의 머리를 가진 사람이 8시간씩 4년을 한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선 나는 2배의 시간으로 4년을 보내야 했다. 내가 4년을 보낸만큼 다른 사람도 4년을 보냈을테니 말이다. 내가 스물넷에 시작했으니 2배의 노력으로 따라잡는 시점인 28살이 됐을 때 나는 기존 사업을 멈추고 팀을 구했다.
팀을 구한다는 소식을 알리자 1주가 되지 않아 15개 회사에서 대표가 미팅을 요청했다. 틱톡의 창립 초기 멤버 중 한 명인 대표도 있었다. 여전히 그렇지만 나는 면접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언제나 대표들과 지원자를 면접 봤다. 그 중 한 팀을 택해 함께 일했고, 여러 어려움 속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만들며 동고동락했다.
내가 창업의 길을 택한 24살때 부터 가족들과 친구들과 지인들은 내 삶을 걱정해주기도 했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걱정이 아니라 두려움만 있었다.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원하는 일이 아닌 걸 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지나고 나서 알게 된 것은 굳이 대표가 아니더라도 능력있는 인재 정도만 되도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어느정도 하면서 사는데는 문제 없었다.
난 21살 무렵에 서른쯤 됐을 때 내 모습을 꿈꾸곤 했다. 그 당시 내가 꿈꾸는 모습은 연봉 3억쯤 되는 남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은 작년 6월에 이뤘다. 그때는 3억이 큰 돈이라 생각했고,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지만 부푼 꿈만 가지며 성공한 모습으로 여러 꿈을 꾸곤 했다. 막상 그 위치에 도달해보니 현실은 꿈 속보다 좋은 게 많았고, 무엇보다도 세상이 두렵지 않아지기 시작했다.
책을 쓰고 싶었다. 중학생때부터 2시간이나 되는 버스 간격을 기다리며 나는 서점에서 살았었다. 그때 언젠가 책을 내볼 수 있다면, 글로 내 지식과 경험과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면 싶었다. 이 꿈은 작년 4월에 이뤘다. 8개월쯤 걸린 도전이었다. 책을 쓰는 순간은 결코 쉽지 않았고, 머릿속에 거대한 믹서기처럼 뒤섞인 것 같았지만 완성됐을 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도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써달라고 하시고, 기다려주시는 편집장 분들이 계신다. 사업이 조금만 더 여유가 생기면 그 다음 책을 쓰고자 한다.
작년 사업이 커지기 전 양악수술을 꼭 해야겠다고 목표했다. 하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것이란 걸 알았다. 그것도 작년 3월에 했다. 수술은 두려움 없이 했지만 죽을뻔한 시간들이었다. 얼굴이 탱탱볼처럼 부어오르고, 턱을 벌릴 수도 없는 시간이 몇주나 이어졌지만 빨리 회복해야했다. 당장 수술이 끝나고 4월부터 강의를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온라인 강의를 찍는 목표도 이뤘다. 작년 4-5월이다. 프로그래밍 전공자도 아닌 내가, 책도 쓰고 개발자들을 가르치고 도움을 주게 됐다. 지금도 나는 이 강의를 우리 회사 개발자들에게 권하곤 한다. 알려주고 싶은 수많은 개념들을 폭넓게 잘 다룬 강의를 찍었다.
방송사와도 일을 하고 싶었고 그 꿈도 이뤘다. SBS, 엠넷, 티브이조선, MBC와 일을 했다. 방송에 보면 연예인 섭외할 때 나오는 VIP 미팅룸에서 피디님, 작가님들과 이야기하며 계약도 했다.
원하는 차도 샀다. 몇 년 전부터 첫 차는 꼭 포르쉐로 사야지 했었는데 원하는 대로 됐다. 원하는 걸 타다 보니 이제 타보고 싶은 차가 많지 않다. 지금 타는 718은 타이칸을 기다리기 싫어서 양재동 포르쉐 인증 센터에서 가져왔다. 하지만 전기차 대형 세단을 좋아해서 타이칸과 테슬라 모델 S도 작년 9월, 작년 12월에 계약해뒀었다.
글 쓰는 것에 대한 꿈도 이뤘다. 이제는 글 한 편, A4용지 2장 정도만 써도 수십만 원 고료를 받는다. 이마저도 바쁘거나 쓰기 싫은 주제면 거절한다.
회사에 대한 꿈도 많이 이뤘다. 독립 사무실을 얻는 것, 사내 게임 대회를 여는 것, 점심시간에 플레이스테이션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것. 20명 이상의 직원을 뽑는 것도 이뤘다. 거기에 외국에 사무실 두고 인도 개발자를 뽑고, 원격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많은 목표를 이루며 살았다. 꿈을 현실로 만들며 살아왔다. 나보다 잘난 사람들도 많겠지만 경쟁은 과거의 자신과 하면 충분하다. 나는 과거의 나에게 자랑스러운 인간으로 살아오고, 과거의 나의 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사람일 뿐이다.
이제 세계로 나간다. 당장 인도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연말엔 미국으로. 인생은 짧다. 나이가 마흔쯤 돼서 아무것도 못 이루었네 하며 자책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시작은 평택 시골에 촌에서 태어났어도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며 살 생각은 없다.
마흔까지 앞으로 9년 남았다. 9년 동안 어떤 일들을 해낼 수 있을까. 12번의 프로젝트 실패와 4번의 사업 실패를 7년 동안 겪으면서 성장해왔다. 9년 안에 몇 번을 더 실패하고, 박살 날지 모르겠지만 두렵지가 않다. 9년 안에 회사에 대한 꿈도 내 인생에 대한 많은 꿈도 모조리 이룰 것이다. 그러면 참 볼만할 것이다. 세상이 보고 놀랐으면 좋겠다. 시골 동네에서 올라온 놈도 성공할 수 있구나 하고. 인생을 이런식으로도 사는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