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8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J의 선택에 따라 J의 회사는 매각될 수도 있고, 아니면 서서히 말라죽어갈 수도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여러 제안을 던졌다. 최초 시나리오였던 투자 컨설팅에서는 여러 미흡한 준비와 상호 간의 입장 차이로 한 번의 미팅이 바로 끝이 났다. 훌륭한 제품을 만들었지만 50억이라는 큰돈은 쉽게 투자할만한 금액은 아니니 말이다.
물론 50억 원을 투자할만한 능력은 A사에 있었다. 그러나 A사의 한국 책임자는 계약직으로 실적 쌓기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에 자신이 가진 능력 하에서 선택을 잘해야 했다. 한국 책임자 B 씨가 엉망이라는 건 J와의 미팅 전에도 느꼈다. B 씨는 전형적인 피해망상을 가진 히스테릭한 중년이었는데, 마치 세상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착각하고 사는 사람처럼 방어적이고 논쟁적으로 모든 사안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J는 내가 보낸 세 가지 미팅 중 처음 제안만 최선을 다했을 뿐 두 번째 미팅은 하루 전에 드롭 시켰다. 이사진과의 협의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번째 미팅의 투자자는 투자 의지가 어마어마했고, 이후 나에게 따로 연락해 자신들이 가진 총 자금력과 VC 파트너십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나로선 J가 답답했지만 그는 망해가는 회사에 레임덕이 와버린 무능한 대표일 뿐이었다.
그가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회사를 떠나는 것이었다. 그것도 좋은 조건으로 매각하고 떠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와 함께 엮인 이들 모두가 넉넉한 투자 수익을 볼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도 좋은 평판을 받으며 이 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회사 매각에는 큰돈이 오고 가는 만큼 회계 문서가 필요하고, 가치 평가 보고서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가 제안했던 것은 상장사 매각이었다. J의 회사에 관심 있을만한 상장사에게 지분의 80%를 400억 원 정도에 넘기는 구도였다. 나와 파트너 K는 수수료 10%를 반씩 나누기로 했다. 도합 40억 원의 수익이 걸린 계약이었다.
J의 의지는 확실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레임덕은 심각했다. 이사진은 그의 모든 결정과 방향에 의구심을 품고 그를 반대했다. 이사진 중 가장 힘이 센 재무 이사는 회사 매각을 위한 회계 감사 보고서 작성에 들어가는 얼마간의 비용도 허락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이 속한 VC에서 파트너십을 통해 10억 정도는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10억으로는 택도 안 됐다. J의 회사는 한 달에 약 4억이 고정비로 나갔고, 직원들은 지쳐서 모두 탈출하는 상황이었다. 서비스 론칭에 따른 마케팅 비용이 절실한데 10억으로는 런칙까지의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버겁고, 마케팅은 꿈도 못 꾸는 돈이었다.
J는 재무 이사의 말을 듣고 우리가 제안한 상장사 매각 시나리오를 보류해 달라 부탁했다. 안타까웠다. FS를 뽑는 것은 매각 과정에서 필요하고, 금액은 조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재무이사의 손아귀에 들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패배자로 이사진에게 찍혔던 것이다.
나는 J의 회사의 속 사정까지 다 알 수 있었다. 그의 회사 직원들, 그중에서도 높은 라인까지 관계가 있었고, 대주주와의 관계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대주주 회사가 얼마나 엉망인지도 알고 있었다. 대주주 회사는 한 때는 이름을 날리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팔다리 다 잘린 무능한 기업으로 사람들이 욕하고 깔보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대주주 아래에 있는 J의 회사 역시 업계에서 좋은 딜이 들어올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아쉬운 소식을 파트너 K에게 전했다. 수 주동안 애써온 노력을 이빨 빠진 J의 손에 맡긴 게 실책이었나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미팅에서 나는 적어도 J가 회사 자금을 1억까진 못쓰더라도 천만 원 언더로는 집행하여 최소한의 보고서 만드는 것은 가능하리라 판단했다. 아니 그 정도도 이사진에서 반대한다면 사비로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내 기대보다 어리석었다. 그는 이사진이 하라는 데로 하고 있지만 이미 배는 구멍이 났고, 선원들은 떠나갔고, 배는 좌초됐다. 마지막 구원마저도 스스로 버리고 떠나갔으니 시간을 들여 그의 미래가 어디를 향할까 보고 싶다.
(시간이 지나 8월 15일)
그의 회사는 무너졌다. 한때는 50명이 넘는 중소기업이라 말하기 힘든 규모였고, 열정적으로 성장하는 곳이었지만 끝났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망해가는 회사에서 견딘 것일까? 단순히 어차피 끝난 거 버티기나 하자는 마음이었을까? 유한책임 회사에서 대주주 다음 최대 지분을 가진 대표가 이렇게 책임감이 없다니 그는 이제 무엇을 하고 지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