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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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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Aug 21. 2023

11월 8일

2022. 11. 8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들은 기술 배워서 공사장에서 일당 20~40만 원 버는 일이 돈 되는 일이라 가르쳐주곤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대학 잘 들어가서 좋은 회사 취직하는 것이 돈 되는 일이라 배웠다.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일하고, 추울 땐 따뜻한 곳에서 일하고.


대학교에 들어가니 교수님들은 모두 대학원을 권했다. 대기업에 들어가 봤자 일만 죽어라 하고 40~50대에 근무가 보장되지 않는다 말했다. 연구원이 되는 건 어렵지만 되고 나면 억대 연봉도 받고, 잘하면 교수가 돼서 평생 인정받고 돈도 잘 번다 말했다.


대학원에서 보니 대학원 재학 중인 석사, 박사 과정 선배들은 대학원을 권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잠도 못 자고 20대를 모두 보내는 나날이었다. 대학원 내에서 장수생처럼 30대 중반까지 연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회에 나오니 대기업, 연구원 모두 고생만 한다고 하고, 이왕 하는 거 스타트업을 하라 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젊었을 때 1년만 고생해서 한 달에 천만 원씩 벌어보자 하면서 숫자 놀음을 했다. 


스타트업에서 몇 년 살다 보니 돈 버는 게 죽도록 힘들다는 걸 알았고, 그나마 돈을 쉽게 번다는 정부 지원 사업과 지원금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스타트업들이 똑같이 그랬다. 


정부 지원금으로 생계는 어느 정도 유지되지만 사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정부 지원금 하나 받기 위해선 온갖 서류 작업과 증빙을 때고, 대표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세무서 공무원 같이 매일 같이 구닥다리 인터넷 익스플로러만 되는 웹사이트에서 공인인증서로 서류 처리하는 게 일이 된다.


결국 밴처캐피털(VC)나 엑셀러레이터들에게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그들은 정부보다 큰돈을 줄 수 있지만 절대 돈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과업을 준다. 스타트업 대표는 밤과 낮이 없이 삶을 쥐어짜야 그들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다.


이 모든 길을 걸어보고 나서 나는 사업을 할 생각을 접었다. 오라는 곳도 많아서 그냥 개발자로 사는 것도 나에겐 좋은 선택이었다. 책도 쓰고, 강의도 하고, 개발자 또는 CTO로 일하면 연에 3~4억 정도는 벌 수 있었다. 그런 고민 중에 개발 의뢰가 하나 둘 들어왔고, 결과적으로 개발사를 차렸다.


개발사를 차려서 내가 얻은 건 많았다. 우리 회사가 성장한 속도를 보면 그동안 스타트업 한다고 고생했던 게 허망할 정도로 쉽게 돈을 벌고, 빠르게 성장했고, 시장에서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평균적으로 회사에 재투자를 하고도 달에 천만 원 넘게 벌 수 있었다.


이 모든 시절을 지나 시장이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이 왔다. 우리 회사는 잘 나가는 시절을 잊고 여러 고객사가 파산을 하거나 지급을 못해 일을 하고 돈을 못 받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들과 소송을 하거나 내용 증명을 보내도 법인 파산 시 돈을 받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지루하고 괴로운 증거자료 제출과 논쟁도 견뎌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며 개발사를 발전시켜 오다 나에겐 큰 기회가 생겼고, 그것이 내년부터 운영하게 될 회사이다. 큰 자본금과 강력한 파트너사와 임원진, 탄탄한 모기업, 그리고 무한책임을 지던 과거의 비즈니스 모델이 아닌 유한책임인 법인을 담당한다는 것은 내 어깨의 짐을 많이 줄여주었다.


이 같은 이유로 나는 개인 사업자로 운영하던 회사를 올해로 정리를 하기로 했다. 지긋지긋한 유동성과의 싸움도 끝내고, 여러 출장으로 회사 내외를 컨트롤하는 것도 내려놓고, 새로운 법인에 집중해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하는 사업부 각각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자회사를 두는 형태로 분리해야 하겠지만 그 과정까지 가는데 조금의 휴가도 있을 것 같다.


쉼 없이 7년 정도 살아온 것 같다. 그중에서 지난 3~4개월은 회사 3개를 운영, 준비, 논의하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한계까지 도달했던 것 같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히고 섞여있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새벽까지 전화하는 나날이 많았다.


나는 스타트업을 했고, 그전엔 대기업을 목표로 공부도 했었다. 주변 친구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보았고, 작은 사업을 운영하다 좌절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도 보았다. 나 역시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갔고, 그 순간순간에 창업가들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을 겪으며 온 것 같다. 


그간의 과정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고, 이 많은 상황에 대해 풋내기처럼 대처했을 것이다. 나보다 10살, 20살, 30살 많은 대표들과 이사진, 상장사 대표, 장관급인 공기업 사장과 차관급인 공기업 본부장들. 그들 모두를 상대하는데 필요한 지혜와 지식이 없었을 것이다.


앞을 향해 나 아가다 보면 은인을 만나고, 그들과 최선을 다해 일하면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 사기 치는 사람도 만나고, 나를 괴롭게 하는 이들도 만나고, 나 역시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일도 마주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세상은 일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진심이 중요하고, 진심을 다해 세상과 사람들을 대할 때 그것이 결국 인정받는다 생각한다.


내년부터 이끌 회사에 결과를 보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내 진심을 담아 사업을 키우고 싶다. 허황된 말과 논리로 사람들을 속이고, 돈 몇 푼을 벌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산다면 사상누각처럼 모든 게 무너진다 믿는다. 도리어 원칙을 세우고 타협하지 않는다는 철칙으로 나아갈 때 결과는 보장하지 못할지라도 사람을 잃지 않고 나를 믿어주는 이들과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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