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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Dec 04. 2023

시대

2023. 12. 4

늦은 밤 서울은 생각보다 고요하다.


평일과 토요일이면 술 취한 행인이 길을 떠돌며 소리도 지르고, 한 껏 차를 자랑하고 싶은 친구들이 배기음을 키우고 강남대로와 도산대로를 지나겠지만 일요일 자정은 고요하다.


얼마 안 되는 서울의 고요한 순간. 바로 지금이 그때다. 그런 고요함 속을 한 경찰 사이렌 소리가 퍼진다. 급박하게 신논현을 지나 양재를 향하는 경찰차는 범인을 추적하고 있다. 지금 그들에게는 평범한 시민들의 고요함이 아닌 범죄와의 싸움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선릉역과 역삼역 사이에 많은 사무실이 즐비하다. 많은 직장인들이 이곳을 오고 가지만, 이곳은 범죄의 온상 수많은 사기 범죄자들이 집결한 고담이다. 순진한 이들과 투자 상품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하지 못한 노인들을 끌고 와 크고 멋진 사무실과 화려한 행사를 하며 그들을 현혹한다.


평생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들과 그들을 따라만 간다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자신이 모은 500만 원, 천만 원, 1억 원. 젊음을 갈아 넣어 번 피 같은 돈을 그들에게 쥐어준다.




나는 돈을 쥐어주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들도 두려울 것이다. 이것이 사기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그 돈을 전달한다. 주변에 몇몇은 돈을 벌었다고 자랑하기 시작한다.


모든 게 짜인 연극.


연극 속에서 자신들이 또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체, 광란에 휩싸여 주변 사람들을 꼬드긴다. 지옥에 같이 갈 동지를 또 한 명 만든다.






지금 범죄자를 추적하는 경찰의 눈에는 범죄자의 차량만 보일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보는 사람에겐 이 글만 보일 것이다. 세상은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게 해 준다. 환상의 나라를 보고자 한다면, 사기꾼들이 보여주는 환상의 나라를 보게 된다. 차가운 진실을 마주하겠다고 용기 낸다면 차가운 진실은 담담히 자신의 속살을 보여준다.


갈 길을 잃은 악인들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동일하다.


더 악한 길.


더 교묘하고,

더 치밀하고,

더 악독하게 해야 살아남는다.


아이러니하다.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이 없이는 빛날 수 없는 삶이라니.


그들의 목과 귀, 손목과 손가락에 낀 반짝이는 보석은, 그들의 추악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대가 진보하며 악한 이들이 서기 힘들어질수록.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부드러운 천을 두르고,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다.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당장 내가 사는 곳 옆 건물에서 피해자가 목숨을 잃고, 내 고향에 사기꾼들이 판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실을 쫓다 보니 내 목덜미까지 칼날을 들이미는 사람이 나타나는 세상 속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유복한 인간일 것이다.


피해자가 우리 곁에 있다.

가해자도 우리 곁에 있다.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도 있는데 세상이 평온하다고 믿는 것은 무지한 걸까, 그렇게 보기로 결정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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