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9.
내가 연안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세상 끝 등대, 박준
선선히 흩어져가는 빗줄기는 마치 찾아올 여름의 장을 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빗줄기가 좋았다. 어린 시절에는 어느 곳에도 갈 수 없을 만큼 강한 빗줄기가 오는 날이면 '오늘은 어쩌면 학교를 안 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홍수가 날 정도가 아니라면 아무리 거센 비가 내려도 학교엔 갈 수밖에 없었다. 가방도 젖고, 바지와 양말, 신발도 모두 젖고. 물비린내가 나는 찝찝함은 좋지 않았지만 그렇게 강한 비가 내릴 때면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잠시나마 떨쳐낼 수 있었다. 그저 이 비가 그칠 때까지 만이라도.
삶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노라면 나는 종종 세상이 폭삭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좀비가 나타나 세상이 망해버린다면. 전쟁이 시작된다면. 핵폭탄이 여기 어딘가에 터져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면. 내가 고민하는 모든 것을 뒤덮을 더 큰 문제가 모두에게 찾아온다면 내 문제는 비에 씻긴 것처럼 깨끗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만약 세상이 내일 종말 한다면. 내가 아직까지 힘겹게 붙잡고 있던 모든 고민들은 다 부질 없어질 테지. 이 비가 멈추지 않고 끝없이 내려 모두가 물에 빠져 죽어버린다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나 가진 게 많은 사람이나 다 거기서 거기겠지. 그렇게 말도 안 되지만 아포칼립스를 꿈꾸는 날이 가끔씩, 가끔씩 있었다.
하지만 철없는 이야기다. 멈추지 않는 비는 없었다. 세상은 망하지 않았다. 온갖 사건들이 펼쳐져도 멀쩡히 굴러간다. 데굴데굴 세상은 잘도 굴러간다. 나라는 놈이 뭘 하든 말이다. 내 걱정이 뭐든 말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큰 비가 내린다. 큰 비가 내려 주인공 기택의 집은 물이 차오르고, 변기에서는 오물이 쏟구친다. 하룻밤만에 집을 잃고, 수해민이 되어 공공시설에서 잠을 청하는 순간이 왔지만 부잣집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세상이 무너지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가장 힘든 사람들이 먼저 쓸려 내려간다. 빗물에 쓸려 내려가는 먼지처럼. 무엇하나 붙잡을 여력이 없이 쓸려간다. 아포칼립스를 꿈꾸면서도 동시에 그 아포칼립스는 가혹하게도 준비할 여력이 없는 이들을 덮치고, 내가 가지고 있던 온갖 고민과 괴로움도 여전히 누군가에겐 고민이 될 수도 없을 만큼 작고 소소한 일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약한 삶의 고통은 마치 신발 속에 들어간 돌멩이 조각과 같다. 거대한 고통이 아니라 견딜 수는 있지만 그것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먼 미래와 비전을 볼 수 없게 만들고, 오직 내 신발 속 뺄 수 없는 돌멩이 때문에 온 신경이 계속 한 곳으로 쏠린다. 때로는 그것이 가시처럼 박힌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서 걸어야 한다. 작아 보이는 그 가시를 빼지 못하고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삶이란, 신발 속 돌멩이가 있다면 그 고통을 견디기보단 걸음을 멈추고,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고, 돌을 빼낼 때까지 가만히 있는 삶이다. 그것이 먼 길을 가는데 더 나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내가 원하는 일을 찾았고, 돌멩이가 빠질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가만히 앉아 괴로움을 하나씩 빼내 보았다.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내 신발 안에는 나를 괴롭히는 가시 같은 돌멩이는 더 이상 없어졌지만, 한 편으로는 돌멩이는 빼도 빼도 끝없이 찾아왔고, 결코 모든 돌을 빼낼 수도 없었던 것 같았다.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해도 여전히 그곳엔 가시밭이 있었다. 넘치는 시원한 물이 있을 것 같던 곳에는 여전히 작은 우물뿐이었고, 더 멀리 가지 않고는 시원한 물을 찾을 수 없었다.
어디쯤 도착해야 할까. 이 모래밭과 가시밭을 건너서 언제쯤 시원한 물이 가득한 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때로는 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도록, 그저 큰 비가 와서 모두를 공평하게 지워주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마음으로 걸어간다.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한 여름의 태양과 비를 견디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흔적이 남는다. 반면 좋은 차에 타서 비와 눈, 태양을 피하며 산 이들에게는 평화의 흔적이 남는다. 그들을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태양의 뜨거움과 빗길을 걸었던 그 과거도 소중한 기억이고,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자랑스러운 과거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비가 온다고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세상의 큰 비가 오면 약한 사람들부터 쓸려간다. 그 비가 지금은 오지 않더라도 언젠간 온다. 어떤 형태로든 온다. 그날을 준비하며 오늘도 태양 빛 아래를 걸어간다. 신발에 모래알이 차오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