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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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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Jul 08. 2024

낙화(落花)

꽃이 다 지고 나서야 수많은 푸른 잎을 볼 수 있었다

memories of summer, thermosento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낙화』








돌이켜보면 그랬다.


올 것 같지 않았던 서른은 벌써 지난 지 몇 년이 됐다. 정해지지 않을 것 같던 미래도 모두 정해졌다. 어떤 꽃이 필지 알 수 없던 새싹들은 이제 나무가 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조금씩 흘러가다 보면 어느덧 나무의 꽃은 지고, 잎을 모두 떨어뜨린 마른나무가 되겠지. 그렇게 우리는 쇠하고 이 세상에서 이별을 고한다.


Duhok Governorate, Iraq


학창 시절을 기억해 보았다. 싱그러운 여름날 같았다. 아무리 먹어도 살도 찌지 않고, 모든 게 불확실하고 두려웠던 날들. 혼자의 힘으론 어디론가 멀리 여행 갈 수도 없어서 친구들이나 교회 모임을 통해서만 갈 수 있던 날들. 가슴 뜨겁게 짝사랑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했던 날들은 마지막은 언제였는지.


꽃이 떨어지는 것처럼 내 삶의 꽃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어린 삶의 모습은 한 꺼풀씩 떨어뜨려 버리고 이제는 뻔하디 뻔한 삶으로 나를 한 걸음씩 이끌어 가는 것 같다. 그렇게 꽃이 모두 떨어지고 나면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고 열매는 씨앗을 남겨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 한 편의 작은 세계다. 생명이 죽어가면서 동시에 열매 맺는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어린 시절의 추억의 색은 여름빛 푸른 바다와 같았다. 이제는 장대하게 펼쳐진 숲의 녹색빛이 되었다. 거대한 숲길을 걸으며 뻔해 보이는 길을 가는 것 같고, 함께 가는 이들을 발견하고. 모두에게 어색한 인생이라는 숲을 함께 여행하는 모험가가 된 것 같다. 때로는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함께 텐트를 치고 늦은 밤을 보낸다. 웃고 떠들며 하루를 이야기하고. 뻔하디 뻔한 세상이라는 곳. 지구라는 세계에 갇혀있으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지낸다.


Oléron, France


신이 보고 있는 것은 이런 모습일까. 거대한 존재의 눈에는 이 지구라는 작은 구슬 안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인류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곳에서 뭐가 그렇게 재밌고, 뭐가 그렇게 슬픈지. 우리는 우리가 떠밀려온 이 세계를 모험하는 모험가가 되어 살고 있다. 이곳을 탐험하겠다고 선택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등 떠밀려 온 이곳에서 우리의 모든 기억을 담고 살아가고 있다.


떨어지는 낙화와 같이 젊은 날이 떨어져 나가고, 이제는 인생의 다음 장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 어쩌면 내가 벗어야 할 것은 얼마 남지 않은 꽃잎을 떼어내는 일이 아니었을까. 나이를 먹어감에도 여전히 어린 시절의 꽃잎을 쥐어 잡고, 그때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큰 숲을 만들고 싶다. 내 삶의 여정을 통해. 작은 구슬 같은 지구를 탐험하며 말이다. 많은 모험가들을 만나 때로는 함께 우물을 만들고, 같이 요리를 해 먹으며 작으면서 거대한 숲을 탐험하고 싶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


꽃이 지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었다.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려주었을 뿐. 모두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때를 알려주었던 것일 뿐.


Everything Fades, Two Penc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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