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필의 말을 타고 적진으로 향한다
때로는 100명의 적보다 무서운 1명의 적이 있기도 하다. 삼국지에 상산 조운, 조자룡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적들을 공포로 몰아넣을 만큼 맹장이기도 했으나 유비에게는 목숨도 내놓을 충신이었다. 유비의 아내 미부인과 그녀의 아기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조조 진영에서 탈출한 일화는 후대에 걸쳐 여러 번 기록됐다. 삼국지의 맹장들이 하나 같이 선명한 단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해면 그의 모습은 너무도 완벽해서 흠잡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아군은 한 명씩 떨어져 나가고 주변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는 그런 날들이 종종 오곤 한다. 함께 멋진 미래를 꿈꿨던 동료들이 떠나가고, 삼국지의 중원처럼 방대한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뿔뿔이 흩어진다.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으며 자신이 한 때는 멸시하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빌어먹기도 한다. 범부일지도 모른다. 살아남기 위해 폭군의 압제를 견디며 살아가는 노예의 마음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남았으니 괜찮지 하며 위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대한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자신보다 큰 존재에 대항한다는 것은 벌벌 떨리는 일이다. 때로는 내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인생을 걸쳐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적, 거인을 쓰러뜨리기 위한 이들에게는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믿음이다. 내가 적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믿음이 두려움을 이겼다. 그렇기에 목숨을 내놓은 싸움을 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다.
인생에는 보이지 않는 값이 존재한다. 젊은 시절의 시간은 노년의 시간보다 값지다. 젊은 시절에 배워둔 지식과 경험은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만들게 되고, 우리는 자신이 만든 세계관 속에서 세상을 보며 살게 된다. 무심코 흘러가는 시간 역시 값비싼 보석보다 비싸다. 누군가 건강하게 아무런 걱정 없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향해 풍요로운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값비싼 보물을 뒤로하고 적을 상대한다는 것은 미친 것처럼 보인다.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쳐들어 가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 아닌 객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정보를 가져오고, 핵심 인물을 사살하고, 적의 심장부를 뒤흔들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역전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필마단기한 이들이 인류사를 바꿨고, 승전국과 패전국의 이름을 바꿨다.
경제의 세계도 전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선 이미 정해진 시장의 규칙들이 쌓여있다. 경제 규칙들은 전쟁과 유사해서 큰 사업을 펼치기 위해선 큰 군대와 같은 자본과 세력이 필요하다. 큰 군대가 각각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포진한 전쟁터에 스타트업의 이름으로 뛰어드는 일은 종종 처량해 보이기도 한다. 이미 시장에 쓰러진 패잔병들이 상처 난 몸 하나 건사한 채로 돌아가기 급급한데 새롭게 전쟁터에 들어오는 신참들이니 말이다.
각 세력이 탄탄히 구축된 시장은 마치 정해진 국경처럼 시장을 나눠먹곤 한다. 이럴 때 판세를 바꾸기 위해 기업은 유능한 엘리트, 임원, 수완 좋은 CEO를 영입해오곤 한다. 책사를 데려오는 것과 같다. 현명한 책 사는 불리한 전황을 바꿀 수 있고,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눈이 되기도 한다.
사업을 하면서 장수로 살아온 것인지, 책사로 살아온 것인지, 군주로 살아온 것인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인간이었는지 생각해보곤 했다. 내 성공은 어디서 기인했고, 내 실패는 어디서 기인했을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나는 필마단기로 사업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끝까지 적을 향해 덤볐기에 조그만 성공의 언덕에 도달했었던 것 같고, 반대로 필마단기했기에 커져가는 일을 함께할 책사와 장수들이 주변에 없었다. 스스로가 책사가 되어야 했고, 장수가 되어야 했고,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이 길이 옳았다 생각했었다.
나는 여전히 온갖 패배 주의자들의 말을 뒤로한 채 묵묵히 내 길을 가고 있다. 돈이 부족해 사람을 쓸 수 없으면 내가 감당하고, 도망치는 사기꾼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멈춰있기보다는 그저 목적지에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갔다. 그 길을 가는 와중에 자신의 둥지를 떠날 자신이 없는 배부른 책사도 만나고, 이곳저곳 세력을 바꾸며 박쥐처럼 기생하는 이들도 만나고, 때로는 적의 폐부를 꿰뚫을 편지 한 통을 전달하는 이들도 만난다. 세계는 전쟁터.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며 살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평화를 위해 전쟁이 있다. 나에게 강해짐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성공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자아실현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군량미와 병기가 필요한 이유는 병사를 모으기 위함이고, 병사가 필요한 이유는 전쟁을 위함인 것처럼, 때로는 목적처럼 보이는 것도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진정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때로는 가장 위험한 방법을 써야 할 때도 있다.
나는 내가 걸 수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걸었을 뿐이다. 젊음과 시간. 보잘것없는 나에게 걸 수 있는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와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시간. 벌써 10년의 시간을 쏟았음에도 여전히 잔이 차지 않았다. 10년의 시간의 값으로 부족했던 것일까. 나의 잔은 얼마나 찬 것일까. 잔이 차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세상을 둘러볼 수 있을까.
전쟁터에서 밀려나간 패잔병들 틈에서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다시 전장으로 나간다. 어차피 이대로 끝날 것이라면 시작도 해선 안 됐다. 나는 그렇게 앞으로 나가고 싶다. 내 뒷모습을 저기 지쳐 쓰러져 있는 패잔병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내 뒷모습이 거대해서가 아니라 비록 작은 뒷모습일지라도 주저 없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기에 멈춘 이들을 뒤로하고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