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29.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꿈에서 깨어나라는 신호다. 젠장할 좋은 꿈은 벌써 끝나버렸잖아. 때로는 꿈과 현실의 경계선 어딘가에서 환청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환청이 없도록 조용한 동네로 가던지 해야지.
때로는 영화를 보고 나면 알 수 없는 취기가 올라오곤 한다. 아드레날린일까. 아니면 꿈에서 깨어난 직후에 올라오는 코티졸일까. 2시간 남짓한 주인공의 서사는 끝나고, 남은 수천, 수만의 시간의 내가 주인공으로 돌아온다. 잠에 들었다 깨어나듯 말이다.
영화는 술과 같다고 말한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때로는 삶에 술이 필요하다. 취기를 빌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속에서 영감을 찾기도 한다. 내가 아닌 타자(他者)에 몰입해 세상을 보다 보면 그 안에 정답이 있기도 하다. 언제나 숫자 놀음을 하며 1+1=2가 되는 세상에서만 사는 건 지루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꿈속에서 나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옆에는 오래전 잊었던 한 여동생이 있었다. 나무로 된 기다란 테이블에서 각자 노트북을 꺼내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디자이너였기에 디자인을 하고 있었고, 나는 학생이었던 것 같다. 헤드폰을 꺼내 음악을 들으며 작업을 하다 나는 문득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개발을 하면서 함수를 쓸 때는 function이라고 모두 타이핑해야 하지만, 수학을 할 때는 f(x)라고 하는 게 더 익숙하다. 수학 문제를 풀어가며 꿈속에서 한참을 보냈다.
요즘 나는 계속해서 그녀를 꿈에서 만나고 있다. 이상한 경험이다. 옆에서 각자 작업을 한다던지 아니면 길을 가는데 방향이 같다던지 하는 일이다. 그러나 재밌게도 나는 그녀와 꽤 친했었지만 정작 이름이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꽤 친했는데 불과 2~3년 만에 이름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꿈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어딘지 익숙한 길거리를 걸어보면서 나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에서도 똑같이 실행해 본다.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약 32~33년간 이어온 삶을 돌아보면 그다지 계획적이지 않게 살아왔기에 항상 이야기할 게 많았다. 남들 같으면 개꿈으로 넘길 일에도 깊게 고민을 해보기도 하고, 꿈에서 본 장면과 사건을 적어두고 그 안에 정확히 어떤 사건이 펼쳐지는지 한참을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나는 자신을 타자로 여기며 새로운 세상으로 빠져들어 그전과 다른 현실로 살아간다. 그러면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종종 사람들은 새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과거와 다른 색다른 경험을 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지 못한다. 너무 크게 생각해서일까. 과거의 나라면 하지 않을 일을 심각하게 해 보면 새 인생이 시작되는 건 선명한데. 나에겐 그게 무척 쉬웠다.
한 번은 사진작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미국에서 나온 한 영화를 보고 말이다. 내가 가진 거라곤 스마트폰도 아닌 폴더폰의 카메라뿐이었지만 사진작가가 된 마음으로 일상 속 멋진 장소들이 어디일지 천천히 걸어 다녀보았다. 학교와 사거리. 자주 지나던 골목길마저도. 같은 공간을 대하더라도 사진작가의 마음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개발자로 살면서 세상의 많은 요소를 코드로 보는 습관도 생겼었다. 어떤 앱을 보던 앱에 기저에는 어떤 시스템으로 구축되었을까 고민해 보면서 그것을 위한 소스코드와 플로우를 생각해 보았다. 아무도 나에게 인스타그램의 시스템 구조를 조사해서 발표하라고 한 적이 없지만 나는 그들의 웹과 앱의 UI를 모조리 뜯어서 HTML 요소부터 그곳에 쓰인 CSS와 각 요소가 차지하는 공간과 사이즈까지도 보곤 했다. 개발 자니까.
꿈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나는 여전히 이 세상이 딱히 현실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엉망인 세상. 어쩌면 문제가 없는 세상보다 문제가 많아서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감도 못 잡게 하는 게 똑똑한 짐승을 다루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싫어하지만 스트레스가 없다면 살아갈 이유도 상실하는 이상한 존재인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레스를 자발적으로 택하는 길은 인생에 유익해 보인다. 누가 나를 괴롭히기 전에 내가 나를 먼저 괴롭히는 것. 그게 참 어려운 일이지만 대단한 일이기도 했다. 재밌게도 사람들은 직장에서 9시까지 출근하라고 하면 적어도 1년에 80% 정도는 지킨다. 아마 그보다 심하면 잘리는 게 당연하겠지만 생존을 위한 약속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약속은 조금 늦어도 대부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스스로와의 약속은 시골 개밥그릇에 던져둔 잔반 마냥 하찮게 대한다. 오늘은 내일로. 내일은 모레. 아니 그냥 기약 없이 미루는 걸로 하자. 이런 마인드다.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는 고스란히 자신의 역사로 기록된다. 어떤 사람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현재 모습을 봐서 뭐 하겠는가. 현재는 요동치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바뀌지만, 살아온 길은 불변하고, 과거는 영원하다. 그가 살아온 길이 곧 그의 삶이고, 그의 진면목이다. 얼마나 휘황찬란하게 말을 하던지 아무런 상관도 없다. 사람들은 얼굴을 보고 평가하는 걸 즐기지만 얼굴에 담긴 세월의 흔적을 보아야 했고, 자질구래한 미사여구에 현혹되선 안 됐다.
이쯤 되니 나는 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남자임에도 화장을 치덕치덕하던지 정상인의 범주에 벗어나는 코스튬을 하며 신비주의를 쓰곤 한다. 놀라운 건 그런 쇼에 사람들은 환장한다는 점이지. 때로는 그들이 주창하는 서비스의 범주가 응당 일리가 있다는 착각까지 들기도 한다. 사기꾼들은 종종 사기를 당할 사람들은 정해져 있으니 먼저 사기 치는 사람이 임자라는 주장을 하는데, 역지사지라는 게 없으니 뻔뻔할 수 있는 법이다. 이기적인 유전자가 타자와 내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고, 나르시시즘으로 모든 프레임이 자신이 중심이 되어버린 인간.
그렇게 현실과 꿈의 경계선에서 종종 나는 삶의 이유와 방향에 대해 방황하곤 한다. 형제와 적. 적과 형제들. 신과 사람들. 사람과 신들. 매일 같은 쳇바퀴를 굴리며 오늘과 똑같은 내일 속에서 다른 경우의 수를 망상하는 범부와 그 범부를 욕만 하며 똑같이 사는 또 다른 범부. 참으로 코미디가 아닐까. 절대적 감시자가 있다면 이 세상은 그 어떤 것보다 웃긴 쇼가 분명하겠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게 어쩌면 나을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 만난 인연이 아무런 이유 없이 만나서 아무런 이유 없이 헤어지는 것처럼. 악인도 범부도. 낫 놓고 기역도 모른다는 말처럼.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