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9.
망했다.
강남에서 5년 가까이 살면서 이렇게 텅 빈 상가는 코로나 때도 볼 수 없었다.
완전히 텅 빈 1층과 2층 상가들. 명목상 장사는 하고 있지만 들어가는 손님이 보이지 않는 상가들도 언제까지 버티려나. 그 높은 세를 내면서 이미지를 챙기기엔 이미 데상트도 도망갔고, 반스도 도망갔다. 뉴발란스는 버틸만하려나.
새로 들어온 오락실과 팬시샵을 나는 종종 관심 있게 보곤 한다. 그 안에 손님이 몇 명이 있는지. 그들이 사는 물건은 얼마나 될지. 객단가를 추려보는 것이다. 강남역 11번 출구, 강남대로를 끼고 있는 1층 상권의 월세와 전기료, 감가상각과 투자금을 모두 고려했을 때 도대체 장사가 되긴 할까.
강남이 이 꼴이니 다른 곳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말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돈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 다시 위로 올라가는데, B2C가 심각하게 박살 난 만큼 그 위는 더 박살 나있다.
최근 나는 토지 가격 약 400~500억 원의 PF를 진행하고 있다. PF가 박살 난 건 초등학생도 알만큼 뻔한 이야기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금융권에서 과거에는 술술 나오던 PF 자금이 이제는 쥐꼬리만큼도 덜덜 떨면서 주는 상황이 됐다. 참 웃긴 일이다. 정말 웃긴 일이다.
PF가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바로 사람들이 추앙하는 돈 많은 부자와 기업들이다. 돈이 많다고 소문이 났는데 돈이 없다. 돈으로 사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끌어올 방법이 없으니 계속 웃돈을 붙인다. 웃돈에 웃돈에 웃돈을 붙여 돈을 꿔오니 그 돈의 이자를 갚다 보면 기둥뿌리 뽑는 건 일순간이다.
몇몇 사람들은 건물주가 텅텅 빈 공실을 두면서도 월세를 내리지 않는 걸 보고 자존심 때문이라고 한다. 아니. 월세를 낮추면 평가 가치가 낮아지고, 그렇게 되면 절하된 가치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러니 나름 난나긴다 하는 자본가들의 숨통이 콱 조여오니 그들의 숨통이 일각을 다툰다. 그럴만하다. 하루에 이자로 몇백, 몇천만 원씩 나가야 한다면 감당 가능하겠는가.
흔히들 요식업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목'이라 부른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구매력이 있는 고객이 많고,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상권. 강남역을 보라. 그 앞에 하루만 앉아서 천천히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 몇몇이나 천천히 가게들을 보며 한 곳이라도 방문을 하는지 봐보면 견적이 나온다. 다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뿐 실방문으로도 이어지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잡다한 물건을 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나라가 개판으로 망했다. 망했다고 말을 해줘도 도대체 들어먹지를 않는다. 체감을 하지 못하니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까지 왔는지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경제감각이 얼마나 없으면 그런 것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때로는 현실 부정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공실을 보면서 "잠깐 비는 거야"라고 말하고, 100조 단위의 PF가 위기에 놓여도 "원래 그럴 수 있어"라는 말로 어물쩍 넘기고. 내 주변에도 그런 식으로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금 나이 예순을 바라보면서 모아둔 돈을 다 잃고 깡통을 찼다.
금융을 다루면서 살다 보니 거시 경제는 그 누구도 이겨낼 방법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거시 경제가 좋으면 사업이 미흡해도 잘 나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혹한기가 오면 생존력 강한 잡초 말고는 모조리 죽는 듯하다. 한 가지 예로 오너 논란이 있는 모 그룹의 경우 지난 몇 년 사이에 모아둔 자금은 다 쓰고, 사업 확장을 위해 준비한 땅도 모조리 매각했다. 겉으로는 잘 살고 있는 척하고 있지만 아마도 많이 괴로울 것이다. 안으로 밖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무능하다 말하고 있으니.
인간의 노동 가치가 바닥으로 치닫을수록 금융 자본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금융 자본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할 곳은 어디인가. 어디가 좋은 '목'인가. 처음 나는 강남이 한국 기업 시장의 목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수많은 주요 기업들은 강남, 역삼, 선릉, 삼성을 따라 사무실을 가지고 있으니. 기업 시장의 목이 강남 ~ 삼성이었다면 금융 시장은 여의도가 있었다. 금융 기관들과 방송사가 모여있는 여의도는 대한민국 자본의 중심에 가까웠다. 또한 권력의 중심지와도 가까우니 좋은 목이다.
하지만 한국 시장이 개판이 된 지금 나는 더 큰 목으로 향하게 됐다. 회사를 한국이 아닌 곳으로 옮긴 것도 한국에 닥친 한파가 언제쯤 끝날지 내 짧은 견문으로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한파가 몇 년이나 이어질까. 바다 건너 미국에 기침을 하니, 한국은 폐병을 앓고 있다. 돈이 피라면 심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세포가 살아남을 것이다. 말단으로 간다면 피가 제대로 흐르지 않아 썩기 시작하겠지.
어쩌면 세계는 이미 썩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화폐를 무한대로 발행하는 이 시스템은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이야기를 한다. 재밌는 건 1992년에 시작된 일본의 불황은 2002년이 됐을 때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렀고, 일본인들도 자신들이 20년 동안이나 버블 붕괴의 값을 지불하며 살지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수많은 경제 석학들과 대단한 부를 지금까지도 가진 일본. 남한 보다는 4배는 큰 일본. 비교할 수 없는 내수와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도 버블이 몇 년이 지나서야 치유가 될지. 아니 도대체 치유는 언제쯤 될지 모르는데, 과연 그보다 빠르게 급속도로 성장한 대한민국과 GDP 대비 극단적으로 높은 부동산 비중은 언제 그 고름이 터지게 될 것인가.
폭탄이 바닥에 깔려서 살고 있는데 폭탄이 밑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은 고마운 사람일까 미운 사람일까. 아마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종착지로 보고 있다면 감당하기 힘든 폭탄을 해체하기보다는 그 폭탄이 터지더라도 살아남으려 애써야겠지. 그게 아니라면 폭탄은 없다며 "오늘도 파이팅!" 하며 본질을 잊어버리겠지. 그래. 항상 그래왔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라고 여기기 때문에 아무 행동도 딱히 할 필요가 없다고 정해버리는 그 습관이. 단 1시간이라도 감당하기 힘든 문제의 답을 찾아볼 생각도 안 하는 그 태도가 결국 무대책의 인간을 탄생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