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4.
나는 개발사를 운영하면서 업의 본질을 떠올려 보았다. 개발사를 운영하는 대표의 괴로움이 무엇일까. 수많은 괴로움이 있지만 클라이언트와 시장 상황에 따라 수익성과 프로젝트 난이도가 극단적으로 변화한다는 점이다. 끝도 없는 클라이언트의 요청들을 적절히 거부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갈등도 빈번히 생길 수 있다. 그렇게 일을 마치면 서로가 기대하는 바가 다른 결과가 쉽게 나온다. 왜 그럴까? 애초에 구체적인 기획 설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기능 명세서도 작성할 수 없기에 개발사에서는 기능 명세서를 직접 제공하는 게 아니라면 이 분쟁을 피할 수 없고, 기능 명세서를 각 클라이언트에 대해 작성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적 비용과 매몰 비용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매몰 비용을 늘리면서 그 비용까지 클라이언트에게 요청하는 것은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가지기 힘들기에 영세한 업체일수록 암묵적 룰을 따르게 된다. 그것이 수정 사항 최대 3번 또는 5번 등 크몽 같은 곳에서 흔히 보이는 최대 수정 사항 횟수에 해당한다. 그렇게 최저가로 만들어진 최저가 상품을 기반하여 가격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개발 외주 시장은 가격의 하한선과 상한선이 극단적으로 나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일을 잘 해내도 상황에 따라 잔금을 받지 못하는 일도 빈번하다. 법인 파산의 경우 외주사는 채권자가 될 수 있지만 채권 순위에서 보통 1순위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제가 있는 법인의 경우 애초에 대출을 이곳저곳에서 발생시켜 사업을 진행하고, 그러다가 마지못해 외주를 주는 상황까지 왔을 때가 유독 많았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후순위 채권자는 권리도 없고 일만 한 상황이 된다.
결국 이 사업은 수익성 측면에서도 리스크 측면에서도 매력도가 높기 어려운 분야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기업은 이러한 리스크를 다양하게 헷징 하는데, 규모의 경제로 많은 국가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경우, 소수 정예로 수준 높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확실하고 검증된 클라이언트만 받는 경우, 회사 내의 템플릿 코드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보편적 기능에 대해 재활용성을 극대화한 경우로 크게 3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 있다.
3가지 타입 모두 앞선 상황에 대해 리스크를 분산하면서 수익성을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기에 그 단계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신규 업체의 경우 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신뢰도 측면에서나 일반 고객들에 노출되는 광고의 빈도나 검색 순위 등 모든 면에서 밀리기 때문에 초기의 팀들이 가지는 경쟁력이라곤 지인을 중심으로 홍보하여 수주하거나 또는 압도적으로 저렴한 가격 정도다.
이 과정에서 실무자들이 겪는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종종 하청의 하청의 하청과 같은 상황에 놓이기도 하는데, 이럴 때면 맨 위에서 수도꼭지를 조금만 잠그면 그 아래는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즉 원청과의 거리를 줄이는 것도 외주 사업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일반적으로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를 보는 입장에서는 원청과의 거리를 줄이기 어렵다. 중간에 마케팅 에이전시가 붙어 처리하는 경우가 빈번하고, 결국 그들의 몫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니 남는 돈은 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IT 기반의 외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은 자체 서비스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B2C, B2B, B2G 모두 가능하고, SAAS가 될 수도 있고, 구독형 모델이 될 수도 있다. 결국 본질적으로는 이 수익 모델이 가진 약점을 자사 제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러한 생각을 오랫동안 가져왔으나 최근 들어서 한 가지 새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사 서비스를 만들어 내 제품을 스스로 개발하고, 마케팅하고, 기획하고, 서비스하는 게 정말 정답일까?'
비유가 적합하지 않을 수 있지만 TSMC는 반도체에서 파운드리에 집중한 기업이다. 반면 반도체 분야에서 선두 주자로 있던 인텔은 혼자서 다 하려고 했다.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니 정작 반도체라는 거대한 분야에서 밀려나게 됐다. 오히려 한 분야만 극단적으로 파고 들어가 압도적 시장 경쟁력을 가지게 된 기업이 되어버리니 결국 모든 기업들이 TSMC와 거래를 하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세계 최정상의 기업으로 올라섰다.
외주 기업도 비슷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주와 반도체를 같은 선상에 비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수 있지만 소스 코드만을 제공한다는 측면을 봤을 때, 이 분야만 극단적으로 파고 들어서 비용과 기술력의 꼭대기에 이르게 된다면 그 분야에서 TSMC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기업이 한국에는 몇몇 코스닥 상장사가 있어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오히려 전 세계 IT 분야의 기틀이라 할 수 있는 인도에 많다. 극단적으로 개발에 집중한 기업이 된 것이다.
자사 제품을 만들어 많은 부분을 인하우스로 처리하겠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합리적이지 않은 결정일 수 있다. 자사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제품 대 제품으로 유사 제품들과 경쟁해야 하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성공 방정식을 만족시켜야 한다. 가격, 성능, 브랜드, 마케팅... 그 과정에서 그 시장의 고객들만이 가진 장단점을 잘 이용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결국 개발을 잘한다고 해서 제품을 만들어 성공하는 게 아니라 어떤 분야던 그 분야의 고객들의 성향과 필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리스크와 스트레스 요인들을 시스템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인 셈이다.
어떤 분야가 산업의 하단부에 있어 하청으로만 먹고 산다고 해서 급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 본질은 내가 상대하는 고객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시스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어야 성공한다는 점이었다. 내 제품을 만들어 성공하는 것도 멋진 일이고, 남의 제품을 잘 만들어줘서 성공하는 것도 멋진 일이다. 극단적으로 하나의 일을 잘 해내야 한다. 하나에 집중하는 비즈니스 할지, 여러 것들을 잘 합쳐 적당한 경쟁력을 가지는 제품을 만드는 일을 할지 그것은 기업가의 선택이다. 이 두 가지 중 무엇이 위에 있고 무엇이 아래에 있다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