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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비 Jan 23. 2024

내 이름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

도형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나는 어려서부터 글/글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명칭인 유아원에 다닐 때는, 내 이름 쓰는 법을 좀 알려달라고, 다음엔 우리 가족들 이름도 다 써봐 달라고, 그러면 내가 따라 써보며 외우겠다고 선생님 꽁무니를 졸졸 쫓던 아이였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한글을 깨치고 우리 엄마는 손 안 대고 코 풀고, 그래선지 그 간편하고도 뿌듯한 일화가 일상에서 여러 번 반복 재생되었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기억이 되어버린다. 딱 유아원에서 생긴 일이 그렇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어떤 것들은 또렷하고 생생한 나의 고유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이름을 크게 써보던 일. 나는 내 이름을 몇 날 며칠 반복적으로 써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 이름은 받침도 없고 부르기도 쓰기도 쉬운 이름임을 알고 있었지만 게다가 도형으로도 변환 가능한 것이 아닌가! 유레카를 외쳤다. 사실 그 나이에 유레카라는 말을 알지는 못했는데 내 기분 마치 아르키메데스였으니까.(사실 그 나이에 아르키메데스라는 사람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이미소→ ○ㅣ☐ㅣ△ㅗ. 쓰고 또 써보던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무엇이 내가 그 이름을 "동그라미, 네모, 세모" 하고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 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비밀스럽고, 조금 특별해졌다.

전설의 스티커

 결혼을 하고 베이킹에 취미를 들였다. 제과기능사 자격증을 따고선 남에게 선물할 자신감도 조금 생겼다. 친지나 친구들과의 만남에 구움 과자를 선물할 일이 잦아졌다. 평소 과대포장은 지양하는 나이지만 음식에만은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을 따른다. 빵이나 케이크를 누군가에게 나눠줄 때에는 포장하는 재미도 쏠쏠한데, 결국 과대포장이 싫기 때문에 반투명 봉투에 스티커 또는 크라프트 봉투에 스티커 조합으로 포장하기를 선호한다. 처음에는 Hand-made나 Home-made라고 쓰인 스티커를 사서 붙이다가 재작년에 나만의 스티커를 만들어 붙이고 싶어졌다. 서예가가 일필휘지 하고 인장을 찍는 것처럼.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야 나를 나타내는 나만의 스티커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궁극에는 어렸을 적부터 나의 정체성으로 삼아온 도형 세 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동그라미, 네모, 세모, 가장 기본적인 도형. 그리고 빨강, 노랑, 파랑, 가장 기본적인 색을 쓰고 싶었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체험판을 내려받고 일주일의 무료 기간이 끝나기 전에 근본 없는 실력으로 이미지 제작에 몰두했다. 인터넷을 뒤져 무료로 저장해 쓸 수 있는 크레파스 질감의 브러시를 찾았다. 삼원색을 활용해 동그라미, 네모, 세모를 같은 크기로 그렸다. 이미지를 완성했으면 스티커 제작사에 주문을 의뢰하는데, 최소 단위는 500매, 나는 호기롭게 1000매를 주문했다.


 평균적으로 한 달에 서 너번 오븐을 켠다. 가정용 오븐으로는 소량 생산만 가능할뿐더러 우리 집엔 이미 먹는 입이 여럿이다. 선물도 시시때때로 할 수 없는 노릇이라 1000장의 스티커는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다. 또 거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더해져 선뜻 손이 안 가는 지점이 있다. 내가 처음 만들고 직접 만들어 애착이 가는 스티커는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의도가 곡해될까 걱정스러운 물건이 되고 말았는데 그건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등장으로 말미암는다. 예를 들자면 내가 구운 쿠키를 포장한 봉투 앞에 붙여진 스티커를 보고는 이걸로 딱지치기하고 지는 사람 뺨 맞기 하자는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동그라미 네모 세모 스티커를 주문한 날짜는 2021년 8월 17일이고, <오징어 게임>의 공개일은 2021년 9월 17일이었다. 동그라미 네모 세모는 내가 먼저 만든 것이 맞는데 이건 거의 혼자만 알고 혼자만 억울한 상황이다. 친구들한텐 다소 웃픈 상황으로 그들은 '길 가다 본 카페 간판에도 동그라미 네모 세모가 쓰였다, 네가 원조 아니냐' 며 제보를 주기도 한다. 시누이가 변리사인데 진작에 스티커를 만들면서 상표등록 문의라도 해볼 걸 그랬나? Facebook이 Meta로 이름을 바꿀 때 한화로 410억을 벌었다는 재미교포 뉴스도 생각이 나고. 생각하면 억울함만 더 커졌다.


 몇 주 전 친정에 내려가 엄마랑 대화를 나누는데 중간에 갑자기 지갑을 찾으시더니 명함을 한 장 꺼내 보여주셨다. 순간 용돈인가 싶어 멈칫했으나 티는 안 났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몇 초간 명함을 앞으로 뒤로 살펴보다 이내 이유를 발견했다. <오징어 게임>의 동그라미, 네모, 세모는 아니었지만 그 명함 속에도 이응, 미음, 시옷이 쓰여있었다. 명함의 주인공은 가곡 ‘비목’의 작사가 한명희 씨로, 그분께서 직접 설립하고 소속되어 있는 곳이 ‘이미시 문화서원’이라는 곳이었고, 따라서 본인 명함에 ㅇㅁㅅ을 넣으셨던 것이다. 최근에 엄마가 일하는 곳에서 그분을 모셔 강연을 열었었다고 한다. 강연이 끝난 후 엄마는 명함을 받았고, ㅇ, ㅁ, ㅅ은 본인 딸 이름의 초성과 같다고 얘기했더니, ㅇ(이응)은 하늘, ㅁ(미음)은 땅, ㅅ(시옷)은 사람: 한자 사람 인을 뜻하는 것이란 설명을 듣게 되셨단다. 그것은 어린 날 스케치북에 끼적이던 한낱 도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꽃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닭살 돋았고, 아주 쪼끔 특별한, 처음에는 나만 알던 내 이름 속 비밀 코드 같은 것이었는데. 그 풀이에는 자의식 과잉이 되고도 남을 만한 치명적 아름다움이 있었다. 의미를 알고 나니 몇 년 전부터 가졌던 억울한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것 같다. 갑자기 품이 넓은 사람이 된 것 같다. 암, 천지인이 이름에 담긴 사람이라면 그리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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