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고
지난 겨울,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 나는 한 지역신문의 기사를 통해서 작년 봄에 시공된 월남전 참전 기념비가 우리 고향에도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월남전 참전을 기념하는 비석은 이미 우리나라 각지에 수 백개씩 자리해 있기에 이번에 고향에서 월남 참전 기념비가 새로 건립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수많은 비석들은 크기도 모양도 천차만별이지만 미군과 함께 월남전에 참전하였다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잊지 말자는 그 설립 목적만은 모두 같다.
그런데 왜 우리는 월남전 참전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국군의 월남전 참전을 지시한 당시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에게 월남전 파병은 6.25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미군의 은혜를 갚는 보은의 길이자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성전(聖戰)에 일조하는 거룩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정말로 월남전은 거룩하고 위대한 전쟁일까?
사실 남베트남은 6.25 전쟁 당시 지상군을 파병한 16개국에 포함되지 않았기에 한국은 남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할 도의적 책무가 전혀 없었다. 당연히 남베트남은 미국의 영토나 속령도 아니기에 월남전 참전은 휴전 직후 이승만 정부가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이행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지리적으로도 베트남과 한국은 멀리 떨어져있기에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북베트남 정권이 다음 상대로 한국을 침공할 가능성도 없다. 결국 한국에게 있어 남베트남을 도울 이유는 도무지 없는 셈이다.
게다가 한국의 입장에서 베트남 전쟁은 승산조차 없는 전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남베트남은 자유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는 커녕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보다도 더욱 부패와 무능으로 얼룩진, 그야말로 파탄 직전의 나라였다. 그리고 전쟁 당시에도 남베트남은 국민 대부분이 북한에 대항해 싸우려 했던 6.25 당시의 한국과는 달리 국민 대부분이 북베트남에 대항해 싸울 의지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전쟁은 미국이 대신 싸워주는 것이라는 안일하고 그릇된 사고에 젖어있었다.
결국 거칠게 말해서 당시 한국의 입장에서 남베트남은 ‘지켜줄 이유를 도무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그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 국민들을 바다 건너로 보내서 목숨을 걸고 싸우게 했으며 파병의 동기조차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혈맹을 더욱 굳건히 함” 이라고 밝힘으로서 국민을 기만하였다.
물론 자신의 국민을 명분도, 승산도 없는 외국의 전장으로 내몬 당시의 박정희를 함부로 살인자라고 단정지으며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약소국의 국가 수장으로서는 최선의 결단을 내렸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64년 소규모의 선발대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1973년까지 지속된 국군의 대규모 월남 파병은 분명 5천여명의 전사자 및 실종자와 1만명이 넘는 부상자를 발생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 후진국이었던 당시 한국의 국방력의 증진과 경제발전에 있어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는 점 역시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월남전 파병의 긍정적인 영향에는 1966년에 작성된 한 통의 각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윈스럽 브라운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 정부에게 보낸 이 각서에는 한국이 월남전에 군대를 계속 파병한다면 이에 대한 보상으로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장비 지원과 함께 한국에 대한 기술 분야의 경제적 지원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후 이 각서는 ‘브라운 각서’로 불리게 되었고 박정희 정부가 1973년까지 월남전 파병을 지속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빈국 수준이었던 당시의 한국은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언제라도 다시 전쟁이 재발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전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고 자국민의 기초 생활 보장을 위해서라도 미국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브라운 각서는 월남전의 국군 참전이 양국간의 이해타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의 경제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해타산적인 외교관계는 특정 국가의 경제나 정치 체제와는 무관하며 시대와 장소, 이념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 단지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자국의 군대를 외국에 파견하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다.
6.25 전쟁에서 유엔군의 참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예로 튀르키예는 1950년 당시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상당했기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유럽의 군사동맹인 NATO의 가입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아시아에 속한데다 이슬람 문화권인 튀르키예가 나토에 가입할 명분은 희박했고 이에 튀르키예는 나토 가입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6.25 전쟁에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서방 국가에게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튀르키예는 마침내 6.25 전쟁 도중인 1952년 12월 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다.
이미 역사는 다른 이에게 피를 빌렸다면 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만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대신 무찔러 준 것을 빌미로 한동안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월남 파병은 결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정의로운 전쟁에 일조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다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6.25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피를 바친 부끄럽고 가슴 아픈 역사의 단면일 뿐이다. 전국 각지에 세워진 월남전 참전 기념비 역시 우리 스스로 강해져서 더 이상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반성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