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 세 숟갈>
나는 요리를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요리 앞에서는 아예 무지에 가깝다.
칼질도 느리고 재료 다루는 모양새는 영 어설프다. 어떤 때는 파를 썰다 손가락을 베고, 어떤 날은 끓고 있던 냄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마냥 데운다.
나는 그저 먹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그래서 요리할 때면 자주 뭔가를 태우거나 넘치게 한다.
그날 무슨 용기가 났는지 혼자 삼겹살 덮밥을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다.
요리 못하는 사람 특유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발동해 유튜브 영상도 틀어놓지 않고 블로그 레시피도 보지 않았다. 그냥 감이라는 것에 의지했다.
냉장고에서 대패 삼겹살을 꺼내고, 양파 반 개를 썰고 프라이팬을 달군다.
능숙하진 않지만 능숙해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재료들을 툭툭 던져 넣는다.
간장을 꺼내든 순간, 나는 잠시 멈췄다. 얼마나 넣어야 할까.
스스로에게 작게 속삭였다. “간장 정도야 뭐 적당히 넣으면 되잖아.”
요리 초보자에게 '적당히'라는 수치는 미지의 계량이다.
나는 한 숟갈을 넣었다. 향이 올라왔다. 든든해진 기분이 든다. 그러고는 이내 싱거울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두 번째 숟갈을 부었다.
뭔가 숟가락 위에 고여있는 간장의 양이 별로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세 번째 숟갈을 추가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냥 어딘가 부족할까 봐, 무언가 확실하지 않아서 그렇게 했다.
완성된 음식은 제법 그럴듯했다. 잘 익은 삼겹살 기름이 윤기를 두르고, 양파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맛은…, 짰다. 분명히 짰다.
고기 육즙과 양파의 단맛이 뒤따라오려다 간장의 짠맛에 밀려 길을 잃는다.
한 숟갈이나 두 숟갈만 넣었어도 이 맛이었을까.
나는 접시를 내려놓고 짠맛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간장 세 숟갈. 그건 요리 자질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의 문제였다.
나는 삶에서도 그런 선택을 간혹 하고는 했다.
한 마디면 될 말을, 두 마디 세 마디로 늘렸다. 친절이나 배려, 감정도 ‘조금 더’ 얹어서 건넬 때가 있었다.
혹시나 부족할까 봐, 혹시나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까 봐, 혹시나 내가 소홀해 보일까 봐.
그렇게 나는 간장을 세 숟갈 넣는 사람이었다.
지나고 보면 내 말은 짰다. 행동은 과했고 마음은 버거웠다.
사람들이 배려를 받고도 가끔 부담스러워할 때가 있었던 이유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과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 짠맛을 느끼고서야 알게 되었다.
어디선가 이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과한 배려는 독이 된다.”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는 혼란스러웠다. 많다는 게 왜 문제가 되는 걸까.
넘침은 사람을 물리게 한다. 배려도, 사랑도, 말도, 음식도 그렇다. '딱 좋은 만큼'을 아는 사람만이 오래 곁에 남는다.
나는 그날 이후 요리를 할 때 항상 레시피를 확인하고 계량컵을 이용하여 최적의 용량을 찾는다.
그리고 간을 맞추기 위해 숟가락을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건 정말 필요한가?”
어쩌면 우리는 삶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복하고 덧붙이는 일에 익숙해진 나머지, 본래의 맛을 잊는다.
담백함을 잃는다.
요즘 누군가를 위로할 일이 생기면 말을 아끼는 편이다.
너무 많은 말은 마음의 염분을 높이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는 조용히 곁에 앉아 있는 편을 택한다. 자꾸만 뭔가를 하려 들면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진다.
글을 쓸 때도 그렇다. 간장 한 숟갈처럼, 가장 정확한 한 문장을 위해 나머지 문장들을 지운다.
나는 여전히 요리를 못하지만 요리 지론 한 가지는 확실하게 머릿속에 각인해 두었다.
간장 세 숟갈은 지나치다. 첫 번째 숟갈은 신중하게, 두 번째 숟갈은 조심스럽게, 세 번째 숟갈은 반드시 망설여야 한다.
삶은 그 망설임에서 맛이 난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오늘 하루 마음속 어딘가에 간장을 붓고 있을지도 모른다.
몇 숟갈쯤이었을까. 그것이 짠맛이 되기 전이라면 우리는 아직 괜찮은 것이다.
너무 늦지 않게 숟가락을 내려놓는다면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관계도, 다시 담백해질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