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작가 백작가

feat 한로로

by Emile
한로로


한로로

유튜브를 보다 보니 '한로로'라는 가수가 가끔 눈에 띈다. "자우림 순한 맛 버전"이라나. 청춘의 불안과 위로를 문학적, 시적 섬세한 가사를 통해 전달하며, 국문과 출신으로서 성공한 바람직한 케이스라는 댓글을 본다. 청춘이 끝나면 불안이 극도로 더 심해진다는 무서운 사실을 MZ들에게 섬세한 문장을 통해 전해주고 싶지만, 차라리 모르는 것이 위로가 될 것이라 생각하며 접는다. 국문과 출신이 작가가 아니라 가수가 되는 것이 성공이라면 오히려 비극 같지만, 그만큼 비 국문과 출신 작가들에게는 희극일 수 있다고도 여긴다. 그녀의 대표곡 '입춘'을 입춘이 한참 지났지만 들어본다. 역시 난 '순한맛 진라면" 보다는 '매운맛 진라면'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순한맛 버전


자우림

그러나 자꾸 생각에 밟히는 것은 역시 '한로로'가 아니라 "자우림 순한 맛 버전"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자우림'은 자동으로 '진라면 매운맛'이 되고 '한로로'는 '진라면 순한맛'이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자우림'을 '한로로 매운맛 버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실례다. 이 세상에는 라면계의 규칙, 즉 매운맛이 먼저 있고, 순한 맛이 나중에 있는 국룰-국물의 오타가 아니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라면의 판매량만 봐도 매운맛이 순한맛을 압도한다. 뿐만 아니라 라면계 톱스타라고 할 수 있는 '신라면'은 이름 자체가 매운맛이고, 글로벌 스타라고 할 수 있는 '불닭볶음면'도 불따귀 매운맛이지 순한맛 '물닭볶음면' 같은 것은 없다. '자우림 매운맛 라면'은 '한로로 순한맛 라면'과 비교 불가다.


개성의 맛


진라면 순한맛 매운맛

그렇다면 누군가 나에게 '알랭드 보통 매운 김치맛 버전', '무라카미 하루키 순한 미역맛 버전' 이렇게 불러주면 그것은 칭찬일까 모욕일까? 뭐 '보통'이나 '하루키'와 비교해 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에 가깝겠지만 그렇다고 썩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닐 수도 있다. 순한맛은 매운맛을 결국 뛰어넘기 어려울 수 있으며, 아무리 매운맛 라면을 강조한다고 한다 해도, 그 고유의 맛있는 매운맛이 아니고서는 나가떨어져간 수많은 여러 종류의 매운맛 라면을 이미 먹어봤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맛의 비결은 순하고 매운 것이 아니라 어떻게 순하고 아따랗게 매운가에 있다. 즉 레시피에는 창조적 개성의 맛이 필요하다. 그것을 같은 순한맛과 매운맛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순한맛과 매운맛을 내는 '요리사'라고 부른다.


흑백 요리사


흑백 요리사

혹시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당신의 맛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순한맛인가? 매운맛인가? 혹 짠맛인가? 단맛인가? '흑백요리사' 요리 프로그램도 아니고 여기서 갑자기 문체의 맛을 물어보면 당황해할 작가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어딘가 '요리사'와 닮지 않았는가? 다만 키우고 수확한 식재료라는 것과 경험하고 상상한 글재료라는 것에만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갖가지 다른 맛을 내는 것은 요리사와 작가의 숙명이다. 그것을 조금 구체적으로 '매운맛'을 애용하는 작가인지 '순한맛'을 선호하는 작가인지 생각해 보기만 하면 된다. 물론 독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맵게 싸다구를 날리는 글을 선호하는가? 담백하고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는 글을 선호하는가? 이것을 단순하게 '흑작가', '백작가'라고 불러 볼까나?


맵고 달게


민트 초콜릿

에밀(Emile)레종 댕댕 작가는 누가 봐도 '매운맛'을 즐겨 쓰는 쪽으로 레시피와 메뉴판을 정했다고 보인다. 글에는 좀 맵고 얼얼함이 있어서, 맛보고 읽을 때 칼칼함과 물고, 씹고, 뜯는 맛이 있는 글이길 원한다. 그리고 너무 '매운맛' 글만 쓰면 자극적이니까, '단맛'으로 적당히 버무리기를 좋아한다. 이를테면 시작은 감칠맛 나는 고추장에 참기름 팍팍 넣어 비비다가, 마무리는 빵 터지는 버터빵으로 매운맛의 간을 조절한다고나 할까? 후식으로 '쫀득함'을 글떡으로 내어 놓기도 한다. 읽을 때 흐물하지 않게 글을 찰지게 반죽해, 마디마디마다 '언어유희'의 건포도나 견과류를 콱콱 박아 넣은 레시피를 선호한다. 가끔 실험적인 애피타이저 메뉴에서는 단짠단짠 글에 진한 모닝커피 같은 시를 일부러 쓰고 싶기도 한다. 민트초콜릿, 슈팅스타 같은 아이스크림 시도 쓰다가 곧잘 망치고 "안 팔리면 다 내가 먹으면 된다고" 자학 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마약 레시피 어둠의 사파 '흑작가'라고 여긴다.


슴슴하고 고소하게


산채 비빔밥

물론 많은 작가들은 '순한맛' 글을 즐겨 쓰는 것으로 보인다. 자극적이지 않게 산채 나물 비빔밥과 같은 슴슴하지만 정통 레시피에 고유의 맛으로 글을 삶아 무치는 작가도 있을 것이고, 읽으면 읽을수록 고소함이 배어 나오는 천연 들기름 같은 글을 만나볼 수도 있다. 가끔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것 같은 심심한 참크래커 같은 글과 마주치기도 하는데, 전문적이거나 지식의 전달이 목적인 건강할지도 모르는 레시피라 천천히 씹을수록 맛있지만 목이 멘다. 맵고 달지 않은 그런 글을 맛보길 좋아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며, 뜨끈한 국물 같은 감동적이고 눈물, 땀, 육수 다 나오는 글을 좋아할 수도 있다. 이런 작가들을 브런치가 선호하는 정파 '백작가'라고 할 수 있으려나?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이 어떤 레시피를 가지고 어떤 개성 있는 글 메뉴를 준비할 수 있냐는 것이다.


매운맛 버전 글로로


불닭볶음면

"자우림 순한 맛 버전 한로로"의 음악에선 어떤 맛이 나는지 청춘이 이미 지났기에 진하게 위로 받지 못했지만, 그녀는 의외로 글에서 어떤 맛이 날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맛'을 염두에 두고 쓴다면 '글'을 좀 더 맛깔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맛깔 맞춤이 아니라 슴슴하고 고소하게 써도 좋다. 눈물, 땀, 육수 다 나오는 뜨끈한 국물 같은 글이어도 따뜻하다. 다만 자신이 글을 쓰는 레시피와 메뉴가 어떤 맛을 지향하는지 알면 더 좋을 것 같다. 글에서 엄청난 요리의 맛을 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베스트 스테디 요리사가 아니라면 그냥 라면 끓이는 정도여도 좋다. 그저 이번 글은 불닭볶음면 매운맛으로, 다음 글은 너구리 같은 쫄깃한 맛으로, 가끔은 스낵면 담백한 맛으로, 사발면 같이 3분 내 빨리 쓰는 글로도, 단지 라면을 끓이는 수준만으로도 글발을 쫄깃하게 뽑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에밀(Emile)레종 댕댕 작가는 누가 뭐래도 '매운맛 버전 글로로'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