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주인이자 관객인 우리 자신에게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 유적을 바라보면
현재의 프로 경기장과 콘서트홀이 떠오른다.
야구장, 농구장, 풋볼 스타디움 등 형태는 다양하지만, 본질은 같다.
로마 시대 군중들이 검투사 시합에 열광했듯이,
오늘날 시민들은 프로 경기나 콘서트에 환호한다
영화 《벤허》의 배경으로 유명한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에서 벌어졌던 로마시대 전차 경주는
현재의 F1 레이싱과 놀랍도록 닮았다
속도와 위험, 그리고 관중의 함성까지.
(최근 F1더 무비를 봐서 더 실감이 난다)
로마시대 검투사들은 노예 신분으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반면 현재의 프로선수들은 슈퍼스타 대접을 받으며 경기에 임한다.
로마시대 검투사와 현대의 슈퍼스타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듯 보인다
하지만 프로선수들도 경기 결과에 따라 몸값이 오르락내리락하니,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무언가를 '걸고' 있는 셈이다.
로마 시대에도 승승장구한 검투사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아 자유민으로 해방되고,
스폰서를 얻어 부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스타의 성공 공식은 2000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시대와 무대만 바뀌었을 뿐, 대중들의 사랑을 동력 삼아 비상하는 영웅의 서사는 끈질기게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로 그 무대를 만든 권력의 의도다
로마 황제들이 검투사 경기를 개최한 이유는 명확했다.
민중의 관심을 끌 오락거리를 제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제5공화국 시절 야구, 축구, 씨름이 대거 프로화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라는 로마의 통치 공식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인 듯하다.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를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우리가 지불하는 '시간'이라는 대가를 한번 계산해 보자.
프로야구만 해도 정규시즌이 7개월에 걸쳐 주 6일 진행된다.
한 경기당 평균 3시간이 소요된다면,
열성 팬이 응원하는 팀의 매 경기를 시청하려면
한해의 2/3 기간인 30주 동안 주당 18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대략 540시간에 해당된다
1년이 8,760시간이고 이중 1/3은 수면을 취한다면
깨어있는 시간이 5,840시간이다
1년에 깨어있는 시간의 약 1/10을 야구경기 보는데만 쏟게 된다
라이벌 팀 경기까지 본다면 그보다 훨씬 많다.
손흥민이나 오타니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은 의심할 여지없이 위대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 합당한 명예와 부를 보상으로 받는다
반면,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푼)돈을 들여 그들의 플레이를 '소비'한다
이 비대칭적인 교환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진실이 고개를 든다.
예능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때 예능 중독자였다
예능 출연자들은 바보스러운 행동으로 우리에게 웃음을 주며 친근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 평생 일해도 갖지 못할 부와 유명세를 누리며,
우리가 살 수 없는 부촌에 거주하고 빌딩을 쇼핑한다.
나는 간혹 스포츠 스타나 아이돌의 병역 면제를 바라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의문이 든다.
멀게는 박찬호부터 2002년 월드컵 대표선수들, 손흥민, BTS까지... 이런 기사들은 반복되어 왔다
우리가 그들을 걱정할 처지인가?
혹시 우리는 BTS를 자식이나 조카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그들의 화려한 삶에 우리의 꿈을 투영하며, 현실의 나를 잊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들의 경기나 공연, 예능을 보는 것만으로 도파민이 나와서 행복하다면 그것을 존중한다.
개인의 선택이니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소비되는 우리의 시간을 좀 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경기장이나 화면 속 스타에게 환호하는 동안에도,
우리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부자인 그들은 돈을 받기 위해 시간을 쓰고 있고
가난한 우리는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돈을 내고 있다
타인의 서사에 '몰두'하는 동안,
정작 '나'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관객석에 앉아있을 뿐이다
나는 우리가 그들의 플레이를 볼 시간에
우리 자신의 플레이를 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시간은,
지금의 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경기장 스포트라이트 속의 주인공은 그들이지만
내 삶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은 오직 나 자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