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시절 연애를 시작할 뻔한 사연
바야흐로 1997년 초
내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던
상병 말 호봉 시기
누군가의 추천으로 소개팅을 했다
군바리가 무슨 소개팅이냐 하겠지마는
상병 말, 즉 병장 보(진급 예정자)는
군생활 6개월만 남아 있는
semi 민간인이다
당시는 복무기간이 26개월이었으니
6개월이면 총 복무기간 대비 23% 남은 것..
대학생 연애 시장에서
남자 몸값의 경우
복학생을
새내기 남학생들과 비교하면
피부의 탱탱함 에선 밀릴지 모르나
갓 제대하고 2학년으로 복학하는 복학생은
대부분의 남자가 피할 수 없는
군역 리스크(?)가 헷지 되어
연애 시장에서 몸값이 높아진다
복학생은 제대하고 나면
통상 제정신 차리고 학교 공부에
매진하는 것도 복학생 몸값의 플러스 요인이다
남자 친구가 주식종목이라 치면
상병 말호봉 즈음부터
주가는 바닥을 치고 턴어라운드 하는 격이랄까?
암튼 내 몸값이 상승하기 시작할 무렵
이를 아는 건지
누군가(기억이 안 난다)가 당시 타이밍에
나에게 연락을 해서
본인 후배 ㅇㅇ를 소개해준다 했다
입도선매 또는
연애 시장에 나온 선물상품 (Futures) 같은 거랄까
군인이던 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ㅇㅇ은
고려대 의대생이었다
내가 군인신분이라
직접 만난 건 아니고
(편지) 펜팔로 연락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위문편지를 써보고 싶었던 걸까?
당시는 카톡이나 인스타는커녕
스마트폰은커녕
휴대폰도 보급 전이고
삐삐 차고 다니던 시기다
지금처럼 모두가 의대에 미쳤던 시절은
아니지만
그때도 여전히 공부 잘하고 똑똑한 친구들은 의대를 갔다
위문(?) 편지로 받은 그녀의 사진과
그녀의 글이 너무 좋았다
90년대 군인들이 제일 위로받는 건
돈도 먹을 것도 아닌
연인으로부터의 편지였다
무엇보다 사진 속의 그녀는 예뻤다
나는 속으로
역시 곧 병장이 되니까
군생활이 펴지듯이
내 인생도 꽃피는구나! 싶었다
그녀와 편지로 약속을 잡고
병장 진급 휴가를 나와서 처음으로 만났다
사실 나는 군바리로서 (주제에)
사귀는 건 아니고
그저 썸 타는 단계 정도였다
그럼에도
병장 휴가기간 중
매일
그녀를 만났다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고
영화도 보고
휴가 마지막 날엔
롯데월드도 가기로 했다
그녀도 나도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고
좋았다
요즘 말로 도파민이 폭발했다~
너무 좋기만 한 것이 불길했다
그 리스크는
휴가 마지막날
롯데월드를 가던 날 터졌다
그날따라 롯데월드의
모든 놀이기구가 대기줄이 길었다
몇 개 못 타고 너무 피곤해서 잠시 벤치에 앉아서
서로에게 살짝 기대어 쉬는데
누군가 우리를 미행하는 게 느껴졌다
먼발치서 쳐다보는 웬 남자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저만치 데려가 그녀에게 뭔가를 따진다
뭔가 잘못된 그림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그에게 님은 누군데 왜 이러느냐 물어보니
그는 나에게 눈을 부릅뜨고
“00이, 남자친구인데요?”라고 나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고개 숙인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고
한참을 그녀에게 뭐라 하던 그는 그녀를 두고 떠났고
나 역시 아무 말 못 하고 돌아온 그녀를 두고 그 자릴 떠났다
당시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라도 할 걸
그게 참 후회된다
이것이 나의 군생활 마지막 휴가의 마지막 날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그녀를 떠났던 내가 속이 좁았다
지금의 나라면
그녀의 의사를 묻고 결정했을 거다
그리고
무슨 마음으로 양다리를 각오하고 나랑 연락을 시작했는지 물었을 거다
아차피 밖에 못 나오는 군인이니 양다리 걸치기 쉽겠다 생각한 거냐고
물론 그녀가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말도 안 하고 만난 건 나빴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내가 맘에 들어서
현 남자 친구 몰래 나를 만난 거잖아?
(정신승리인가?)
지금 보니 그게 감사하다
당시엔 나는 너무 어렸고
내가 양다리의 세컨드(?) 였다는 충격이 커서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참 순진하면서
순수했고
또 상대에게도 같은 수준의 순수를 기대했기에
그만큼 실망이 컸다
만약 지금 그날로 되돌아간다면
지금의 나는
그날의 롯데월드에서 그녀를 붙잡았을 것 같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가서
미래의 팔자를 고치라고
다그치고 있다~
찌질하게 시리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