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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화 Jan 01. 2024

시험은 운칠기삼이지.

내가 공인중개사를 하게 된 시발점.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가을 무렵이었나.

학부모 모임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그곳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을 법한 포식자 느낌 돋는 언니 한 명이,

거침없는 말투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나야 뭐 존재감 없는 사람이니, 생각 없이 밥을 아구아구 먹으며 대화를 듣고 있는데,

그 언니 왈

" 나 이번에 공인 중개사 시험 준비하려고!"

(응? 공인중개사? 오 괜찮은데.

집 근처에 사무실을 열면 애들 키우면서 하기에도 딱 좋을 것 같아.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니까 열심히 해서 1년 만에 따면, 입주장에 숟가락을 냉큼 올릴 수도 있겠군! 느낌 왔어. 느낌 왔어.  그래!! 바로 이거닷!!!)

밥 먹다 그 언니를 흘깃 보니, 표정은 벌써 10년 차 소장님의 얼굴이다. 자신감 넘쳐. 기백이 장난이 아니야.

그때, 옆에 있던 친한 언니가 작은 목소리로

"나 그거 있는데... 우리 애 유치원 다닐 때 땄어"

 순간 포식자 언니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네가?"

......

......


뭐어지???.

이 포식자 언니 사람 무시하나? '네가' 라니? 마치 '니 까짓게'라고 말하는 뉘앙스였다.

공인중개사 자격증, 그 뭣이라고 이 분위기  무엇???


"저~언니. 저랑 같이 하실래요? 저도 급 관심 있는데 하!"

정적을 깨고 내가 한 마디 했다.

그러자 그 언니 약간의 실소를 얼굴에 머금으며 나에게 말했다.

"야! 너는 안될 것 같다."

"왜여?"

"몰라~! 그냥.!  어쨌든 넌 안될 것 같다."

(으응? 이 언니 뭐야!!)

또 정적.

친한 언니는 야, 뭐라 한 번 되받아쳐봐! 너 지금 무시당한 거야!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분위기 삭막하다. 화,,, 화낼까?

용기 내서 목소리 높여 말했다.

"어마맛! 이 언니 사람 띄엄띄엄 보네. 이래 보여도 제가요, 객관식에 남다른 재주! 있거든요. 오죽했으면 내 어릴 때 별명이 객관식의 여왕이었을까!!! 얼마나 잘 찍는데!!"

(잘 받아친 건가?

응응. 조금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런 거 같아.)


여튼, 성질은 급해서 담날 사람 양껏 무시하는 그 포식자 언니랑 공인중개사학원을 알아보러 갔었다.

우리 집에서 출발해서 버스 타고, 지하철 갈아타고, 걸어가서 학원 도착하면 1시간 30분.

왕복이면 3시간.

상담 한 번 받고 왔을 뿐인데, 집에 오니 마치 데친 시래기 마냥 흐물흐물해졌다.

밥도 해야 되고, 빨래도 해야 되고, 청소도 해야 하는데, 왕복 3시간에 하루종일 공부도 해야 한다고?

와..... 무리데쓰! 무리데쓰!

그 언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언냐. 나는 인강으로 해야 할 것 같아. 왔다 갔다 너무 힘들더라고"

"야! 그러니까 내가 너보고 안될 것 같다고 한 거야. 의지가 그래가지고 자격증 딴다고?

그게 너와 나의 차이인 거야. 알겠어? 으이그."

그 언니의 개연성 있는 빈정거림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그날로, 의지 굳은 포식자 언니는 학원을 등록했고, 나는 인강을 등록했다.


사실 혼자 인강을 들으면, 가장 큰 문제가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거다.

잘하고 있는 건지. 못하고 있는 건지. 모르는 것도 모르는 것.  그게 문제다.

한참 시험의 압박이 조여올 7월. 그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공부 잘되고 있어?'

"모르겠어. 난 민법이 너무 어려운 것 같아. 공법은 ..."

"쯧쯧. 7월인데 아직 민법도 못하면 어째? 그래갖고 되겠니?

한심하다 참."

(아씨. 몰라 끊어. 어려운데 어쩌라고. 아무리 들어도 외계어 같은데,

이건 뭐 거북이 등껍질에 갑골문자 해독하는 게 더 쉽겠구만.

그나저나, 이 언니는 뇌에 주름이 없는 건가? 항상 느끼지만 말을 걸러주는 거름망이 없어.)

그렇게 시험이 있는 10월 마지막주 토요일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 비록 가방끈 딱히 길지 않으나, 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애들 학교 보내놓고, 애들 올 때까지 책만 본 것 같다.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책이 나인지, 내가 책인지 열심히!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

이 자세로 10대를 보냈으면 서울대 의대 갔을걸.

아침에 책을 보다 문득 고개를 드니 해가 져 있는 광경을 목격하는 신비로운 경험도 해봤다.

근데, 희한한 게 시험이라는 것이 운칠기삼이 맞더라고.

열심히 하면 하늘도 알아주는 듯하다.

'오호.. 요 녀석이 열심히 하고 있구나~' 하고.

모의고사를 치면, 민법 총칙 1번부터 10문항 이상은 시원하게 틀리고 시작하는데 시험날은 다 맞췄더라고.

(채점하면서 남의 시험지 잘못 들고 나온 줄 알았네. 쿡 찍었는데 다 답이었어.)

그리고 40점을 넘겨본 적이 없던 그 공법이라는 공포의 과목은 시험날 60점을 받는 기염을 토해 버리고 말았다나 뭐라나.

크크크크. 붙었다. 한 방에.


"언냐. 어찌 됐어? 나 동차합격했어"

"응.. 2차 시험은 잘 쳤는데, 1차 민법이...."

"아... 그랬구나."


그리하여 포식자 언니는 삼수를 하였다.


언냐...시험은 운칠기삼인 거 같어.

운이 70프로, 기세가 30 프로인거지.

언니 기세는 30프로 만점인데,

운은 있잖아...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사람에게 오는 건가 봐.

그래도 언니의 중단없는 근자감은 너무 박력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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