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지구는 돈다.
물건을 접수하러 온 중년의 남자분의 얼굴은 무척 초췌했다.
"얼마에 내놓으면 집이 팔릴까요?"
임차인 만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집을 꼭 팔고 싶다고 하신다.
"글쎄요. 동호수가 나쁘지 않고 정남향 집이라 사람들이 선호할만한 집이긴 한데, 요즘 집값이 너무 내려서... 보통 2억 정도에 매도 가격이 형성되어 있기는 한데, 쉽게 거래가 안 돼요"
"그럼... 1억 8천에 내주시겠어요? 이번에 꼭 팔아서 제 치료비로 써야 하거든요."
1억 8천... 전세금 1억 6천만 원을 내주고 나면 2천만 원도 채 남지 않을 텐데 너무 급하게 처분하시려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췌장암을 앓고 있다는 손님은 투병 중임에도 공사장에서 아직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많이 야위고, 얼굴색이 안 좋다.
"제가 장애인 형을 돌봐야 하거든요. 얼마 전에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저도 몸도 아프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마트를 못 가요. 어머니랑 장보고 했던 때가 생각나고, 엄마도 보고 싶고..."
느릿느릿,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는 중년의 아저씨가 가엽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픈 형과 늙은 노모를 돌보며 살아왔는데 이젠 자신도 암에 걸려서 희망이 없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순진하고 귀가 얇은 탓에 집값이 많이 오를 거란 어떤 소장님의 말에 덜컥 갭투자를 하게 되었고, 그 덕에 살고 있던 임대아파트에서 나와야만 했단다. 어쩔 수 없이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서 그 소장님이 소개한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전세자금대출 이자가 너무 올라서 병원비는 고사하고 이자내기도 빠듯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제대로 된 가격을 받고 싶지만 이번에 팔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어쩔 수 없다.
그렇게라도 팔아야만 한다.
부동산 매물 사이트에 광고를 올리고, 사진을 예쁘게 찍어서 블로그에도 올렸다.
다행히 살고 계신 임차인분께서는 집도 너무 깨끗이 관리하고 있었고, 손님이 집 보러 온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집도 보여주시고 너무 살기 좋다는 너스레도 살짝 얹어주시는 센스가 있으신 분이었다.
광고를 올리고 얼마 후 블로그를 보고 전화를 한다며 집을 보여달라는 중년의 아줌마.
집을 휙휙 대출 둘러보고는 당장 이 집을 사겠다고 한다. 그리곤 오백만 원 깎아달랜다.
"저, 사모님 지금도 시세보다 2천만 원이나 싸게 나왔고요. 그리고 매도하실 분이 이 집을 팔아서 암 치료비로 쓰셔야 하거든요. 깎는 건 좀..."
"일단 집주인한테 전화해 봐요. 집사면서 안 깎아주는 경우는 또 어디있대? 몇 백이라도 깎아봐요. 그게 부동산에서 하는 일 아니에요?"
내가 고객의 아픈 사정까지 이야기하며 달래 봐도 그냥 막무가내다. 무식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박력까지 장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아줌마가 그렇다. 그냥 무조건 깎으랜다.
내 집도 아닌데 진짜 깎아주기 싫다. 그냥 '손님 그만 안녕히 돌아가주세요'라고 말할까 순간 고민도 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이 손님을 돌려보낸다고 해도 분명 다른 부동산에 가서 똑같은 물건을 보고 또 깎아달라고 하게 될 거란 걸 안다.
마음이 무겁고 입이 떨어지지 않으려 하지만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오백만 원까진 힘들고 이백만 원 깎아주신다고 하시네요... 그리고 현시설물 상태의 매매 이므로 욕실에 약간의 타일 크랙이 있는 건 감안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계약은 진행되었다.
중년의 아줌마는 계약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이 신용이 별로 안 좋아서 대출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며 계약금을 돌려주면 안 되냐는 전화를 해왔었다.
딱 잘라서 말했다.
"안 됩니다. 계약할 때 읽어드렸잖아요. 매수인은 계약금을 포기하셔야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얄미운 매수인에게 냉정하게 이야기했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계약금을 날리는 건 매수인 사정이지만 이번에 팔지 못하면 매도인도 전세 보증금을 내주지 못한다. 살던 임차인도 다른 집 계약을 벌써 해 두었을 테니 여러 가지로 곤란한 상황이 연출이 된다.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계약금이 아까워서라도 어디선가 돈을 구해올 사람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그렇게 다가온 잔금일.
계약금을 날릴 수 없었던 매수인은 여기저기서 극적으로 돈을 구했나 보다.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부탁했을 때 냉정하게 잘라 말했던 공인중개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사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표정이 굳어있다.
"잔금 치기 전에 집 한 번 더 봐야겠는데요."
"아, 네. 그렇게 하세요"
매수인 아줌마는 이삿짐을 싸고 있는 집에 가서 어찌나 꼼꼼히 보고 왔는지 시간 맞춰 도착한 법무사가 한 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욕실에 타일 몇 장이 금이 갔던데요"
"어? 알고 계셨잖아요. 처음 갔을 때도 보셨고 설명드렸잖아요. 그래서 금액도 깎으셨는데..."
"아. 아니죠. 전 그런 기억 없어요. 타일 값 깎아주세요. 안 깎아주면 저는 잔금 못 쳐요"
마음 약한 집주인은 그 자리에서 또 50만 원을 깎아주겠다고 한다.
"50만 원으로 타일 못 갈아요. 백만 원 깎아주세요"
어깃장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현 시설물 상태의 매매니, 계약할 때 언급을 한 것이니, 확인 설명서에도 타일 크랙이 있다고 적혀있다는 설명을 해도 "난 잔금 못하겠다"로 일관한다.
경우 없고, 양심 없고, 박력만 있는 이 아줌마가 정말 싫다는 생각이 든다. 욕이 마렵다.
"사모님. 더 이상 깎지 마시고 저희 중개수수료를 30만 원 깎아드릴 테니 그냥 잔금 마무리 하는 것이 어떨까요?"
수수료를 깎아주겠다는 말에 표정이 누그러진다.
이런 인간을 더 이상 상대하다가는 나쁜 것이 나에게 묻을 것 같다.
얼른 마무리하고 내 사무실에서 내보내자!
그렇게 잔금이 끝나고 매도인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봉투에 수수료를 현금으로 담아서 건넨다.
매도인이 지어보이는 옅은 미소가 나는 왜 슬플까.
"고맙긴요. 많이 못 받아 드려서 너무 미안해요."
매도인이 건네고 간 봉투엔 법정 수수료보다 20만 원이 더 들어있었다.
고맙다는 말도, 법정 수수료보다 더 들어있는 현금도 부담스럽다. 단지 미안하다. 내가 들을 말이 아니고 내가 받아야 할 돈이 아니다.
전화를 했다.
"고객님. 여기 서류하나 빠뜨리고 안 들고 가셨는데요. 찾아가셔요."
그리고 나도 봉투에 돈을 50만 원을 담았다.
좋은 가격으로 팔아드리고 싶었는데 잘 안돼서 마음이 좀 안 좋네요. 저흰 법정수수료보다 돈 더 받으면 안 돼요. 20만 원 돌려드려요. 그리고 30만 원은 매수인만 깎아주면 섭섭하실 것 같아서 깎아드리는 거예요.
꼭 쾌차하시고 좋은 여자친구도 만나서 연애도 하시고 그러면 좋겠어요.
파이팅입니다. 고객님!
어느 한 개인에게 쓰나미 같이 불행과 슬픔이 덮친다고 해도 지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조금 애잔해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 슬픈 운명속에서도 작은 행복과 작은 희망에 더 초점을 두고, 억지로라도 조금 더 크게 웃고, 조금 더 사랑하고 용서하며 주어진 시간을 채운다면... 그 와중에도 감히 행복을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 비운의 삶을 살게 한 신에 대한 숭고한 저항이고 항명이 아닐까.
끔찍하게 똑같은 운명을 살아야 했던 시시포스가 어느날 잔망스런 트월킹을 추며 돌을 밀어올린다면 신이 얼마나 열받겠냐는 어떤 유튜버의 말처럼, 슬프고 괴롭지만 소리내어 웃어주길. 꼭 행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