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4 투혼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남은 복서 김득구
김득구 (1955.01.08 ~ 1982.11.18)
지금은 UFC와 같은 종합격투기의 인기에 눌려 예전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상황이지만 한때는 투기의 꽃이 권투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름이 줄줄 떠오를만큼 위대한 복서들이 명멸해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나는 이름 하나가 바로 '김득구'라는 이름입니다.
1982년 11월 14일, 라스베거스 시저스 펠리스 호텔 특설링, 젋고 잘생긴 백인에 뛰어난 기량으로 이름을 드날리고 있던 무패의 젊은 챔피언 레이 붐붐 멘시니는 한국에서 온 헝그리 복서 김득구와 승부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모든 스포츠 평론가들이 무명인데다 나이도 많은 김득구의 절대적인 열세를 점치고 있었고 멘시니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 경기가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였으나 최악의 비극을 낳는 경기가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죠.
공이 울리고, 열세로 예측되었던 도전자나 우세를 점했다던 챔피언이나 클린치도 거의없는 난타전이 시작되었고 모두의 피를 끓게만드는 명승부가 14회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4회가 시작하자 마자 챔피언의 짧은 스트레이트를 얻어맞은 도전자는 링에 쓰러지게 되고 치명적인 뇌손상을 입은 도전자 김득구는 결국 4일이 지난 1982년 11월 18일, 영영 세상을 떠나게 되죠.
이 경기의 여파는 상당했습니다. 당시 게임의 주심을 맡았던 리처드 그린은 김득구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7개월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김득구에게 승리했던 레이 멘시니 역시 우울증에 시달리며 여러 번의 자살시도에 롱런할거란 타이틀도 잃게 됩니다. 또한....자신의 가난으로 아들을 사지로 몰았다고 울부짖던 김득구의 어머니도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죠.
WBA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복싱 라운드를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단축하게 되었고 WBC와 IBF역시 1988년에 그 뒤를 따르게되죠. 하계 올림픽 복싱 종목에서도 3,4위전을 폐지하고 준결승에서 패하면 무조건 동메달을 수상하는 것으로 변경하고 헤드기어 착용을 의무화시키게 됩니다.
11월 18일, 오늘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어느새 37년째 되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