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V 빌헬름 구스틀로프

역사에 남은 선박들

by 전재성
1.jpg 1937년, 취역 당시의 빌헬름 구스틀로프

전쟁 중 참상은 당연히 평상시보다 훨씬 참혹하기 마련이다. 제네바협약처럼 전쟁 중 민간인이나 비전투인원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들도 마련은 되어있었지만 길어지면 서로 증오만 쌓게 되는 전쟁의 특성상 인도주의적인 처사는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무방비하게 죽어가는 사태는 비일비재했다. 도냐파즈호 침몰사고가 평상시 최악의 인명피해를 낸 해난사고라면 오늘 소개하는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사고는 전쟁 중 벌어졌던 사상 최악의 인명피해를 낸 사건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MV Wilhelm Gustloff) 침몰 사고는 1945년 1월 30일, 발트해에서 발생한 역사상 최악의 해상 인명 사고였다. 통상 해난 사고의 기준이 되어버린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의 희생자 수보다 6배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대전중의 혼란과 패전국 독일의 상황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사건이다.

Wilhelm-Gustloff.jpg Wilhelm Gustloff (1895. 1.30~1936. 2. 4)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지금의 다보스포럼 -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 이 열리고 있는 스위스의 다보스에 독일 밖에 거주하는 독일인들로 구성된 나치당의 지부 - NSDAP/AO(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 Auslandsorganisation) - 를 창립했던 인물로 독일에서도 인정받는 열렬한 나치의 신봉자였다. 하지만, 1936년 2월 4일 크로아티아 출신의 유태인 의대생이었던 다비드 프랑크푸르터(David Frankfurter, 1909~1982)에 의해 총격을 받고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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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당과 히틀러는 그가 세상을 떠나고 1년 후였던 1937년 5월 5일에 진수된 여객선에 열성적인 나치당원이었던 그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그렇게 빌헬름 구스틀로프라는 이름으로 취역하여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재건된 독일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대단히 호화스럽고 각종 첨단시설로 지어진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총톤수 25,484t에 전장 208.5m, 전폭 23.59m의 거대한 선체에 1,500여 명의 승객을 승선시킬 수 있는 숙박시설과 대형식당 2개, 강당 3개, 극장, 살롱, 체육관과 수영장 시설 그리고 분만이 가능한 병원시설까지 갖춘 형태로 현대의 크루즈선과 비견될 정도의 호화스러운 모습이었고 실제 이용을 원하는 이들에게 정부의 지원들 받아 대단히 저렴한 금액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 많은 독일인들에게 복지정책을 선전하는 도구로써 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39년 9월, 독일이 국경을 넘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직후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독일 해군에 징발되어 병원선으로 개조된다. 이후, 1940년에는 발트해의 항구도시 고텐하펜에 정박하여 독일해군 잠수함전대의 입항 후 숙소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긴 항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복귀한 유보트 승무원들에게는 안성맞춤으로 마련된 휴식공간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종전이 가까워지는 순간까지 비교적 안전한 공간이었던 발트해안에 머물며 계속 해군의 숙소로 사용되었고 이는 1945년 1월까지 이어지게 된다.


한니발 작전(1945. 1.23)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이 독일의 패배로 귀결되고 이후 동부전선에서 예봉이 꺾인 독일군은 전열이 밀리기 시작했고 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하며 두 개의 전선에서 모두 열세를 보이며 밀리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소련을 밀어붙이며 점령지로 옮겨갔던 독일국민들은 이로 인해 불안감이 극에 달하게 되었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두 달후인 1944년 8월, 소련이 벨로루시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중부집단군에 대한 대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을 개시하며 독일의 동부전선은 대대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발트 3국 지역으로 소련군이 쇄도하기 시작하며 당시까지 안전한 후방이었던 폴란드와 발트해 지역도 더 이상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렸고 점령지로 이주했던 독일국민들도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 해군총사령관이었던 카를 되니츠 제독은 낙오한 독일군들과 피난에 나선 독일국민들을 독일령 덴마크나 독일 본토로 탈출시키는 작전을 계획하였고 이것이 바로 한니발작전이었다. 당시까지 유보트의 군항이었던 고텐하펜에 정박 중이었던 빌헬름 구스틀로프 역시 이 계획 한 복판에 놓이게 되었고 폴란드와 동프로이센, 소련의 점령지에 머물던 병력들과 피난민들의 물결이 도달하며 태울 수 있는 모든 이들을 배에 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된다. 1,500여 명을 태울 수 있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 오른 이들은 이미 6,000명이 넘어섰고 생존자들과 당시 승선을 담당했던 인원들에 증언에 따르면 10,000여 명에 이를 정도의 엄청난 인파들을 받아들여야 했다고 전한다. 비공식 집계로 배에 오른 인원은 총 10,582명으로 배의 크기를 감안해도 그야말로 엄청난 과적상태였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피난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sinking-Soviet-one-disasters-MV-Wilhelm-Gustloff-January-1945.jpg 소련 잠수함 S-13의 빌헬름 구스틀로프 공격을 담은 삽화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최후(1945. 1.30)

해군사령부로부터 발트해에서 활동 중이던 소련의 잠수함 3척이 철수했다는 정보를 받고 어뢰정 뢰베(Löwe)호의 호위 아래 수많은 피난민들과 병력들을 태우고 1945년 1월 30일 오후에 항구를 벗어난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독일의 군항이었던 킬(Kiel)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하지만, 항해 직후부터 선장이었던 프리드리히 페테르센과 승선 중이었던 독일 해군 장교중 최선임이었던 빌헬름 찬 소령의 피난경로에 대한 의견이 갈리게 된다.


빌헬름 찬 소령은 제공권과 제해권이 소련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배를 최대한 연안에 붙여서 독일 육군과 공군의 지원을 기대하며 항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선장은 연안에 여전히 위협적으로 남아있는 기뢰를 피하고 과적으로 인해 배의 흘수선이 기준치보다 훨씬 내려간 상황이라 가장 깊은 수로를 통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야 한다고 맞선 것. 토론 끝에 프리드리히 페테르센 선장의 의견이 채택되었고 발트해 가장 깊은 수심의 수로를 통해 서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활동 중이던 모든 적 잠수함이 철수했다는 판단은 틀린 정보였고 탈출하는 독일선박들을 잡기 위해 철수를 미룬 한 척의 잠수함이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필 당시 발트해는 영하 16도까지 떨어지는 이례적인 한파가 몰아닥쳤고 등화관제를 철저히 하며 야간항해를 감행하던 중, 기뢰를 제거하기 위한 독일 소해정 편대가 접근 중이라는 전문을 받은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충돌을 막기 위해 잠시 양현의 항해등을 점등했고 당시까지 그림자만 보며 접근 중이던 소련 잠수함 S-13은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심야로 향하던 21시, S-13은 네 발의 어뢰를 발사했고 그중 세 발이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좌현에 정확하게 명중한다.

Strikeimage.jpg 빌헬름 구스틀로프에 명중한 어뢰의 위치. 특히 세 번째 어뢰가 가장 치명적이었다.

기관실을 직격 했던 3번째의 어뢰로 인해 배는 동력과 전력을 잃고 암흑상태에 빠졌다. 거기에 가뜩이나 과적으로 인해 부족한 구명정과 발트해의 이례적으로 낮은 기온은 탈출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버렸고 피격 후 40여 분 만에 완전히 좌현 측으로 전복되고 만다. 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인원들은 어뢰 자체의 타격에서 이미 수많은 인명피해가 일어났고 호위 중이던 어뢰정 뢰베호와 인근의 순양함 아드미럴 히퍼, 함께 피난 중이던 수많은 선박들까지 달려왔지만 10,582명의 탑승인원 중 구조된 인원은 1,252명뿐이었다. 당시의 아비규환에서 이 정도의 인원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기적적인 일이었지만 어쨌든 9,000여 명의 인원이 어뢰 세 발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

Bundesarchiv_DVM_10_Bild-23-63-24,_Schwerer_Kreuzer__Admiral_Hipper_.jpg 중(重) 순양함 아드미럴 히퍼. 구조에 나선 선박 중 가장 대형선이었지만 잠수함의 위협으로 가장 먼저 사고 현장을 벗어난다.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격침시킨 S-13(함장 알렉산드르 마리넨코 소령)은 독일과 소련이 동맹 중이었던 1939년 5월, 독일의 설계와 독일제 부품들로 소련에서 조립, 진수된 잠수함이었던 것도 아이러니다. 결국 수많은 독일국민들의 목숨을 독일의 기술력이 앗아간 것. - S-13은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격침시키고 11일 후인 2월 11일, 독일 여객선 SS 게네랄 폰 슈토이벤호를 격침시켜 4,000여 명의 독일인을 또 수장시키며 가장 많은 민간인을 죽인 잠수함으로 남게 된다 -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희생자 수는 타이타닉호 사망자의 6배에 육박하는 수치로, 아직까지도 단일 선박 사고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사고로 기록되게 된다. 이런 큰 사건이었지만 당시 패전으로 내몰리고 있던 독일은 이에 대한 그 어떤 보도도 하지 않았고 히틀러가 사망하고 전쟁이 끝난 시기에 비로소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최후는 전쟁의 광기, 잘못된 지휘 판단, 그리고 혹독한 발트해의 기후가 겹쳐 만들어낸 최악의 비극으로 남아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였던 독일이 겪은 참상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현재에 와서는 전쟁이라는 상황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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