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보낸 편지(3)
2012.12.14
현재 본선은 제대로 된 겨울 북대서양의 거친 바람과 파도를 두들겨 맞으며 베네수엘라를 향해 남서진중입니다. 현재 앞바람으로 순간 55노트의 바람이 불고 있어서 선교의 문을 여는 것도 겁날 지경이죠. 겨울철 북대서양과 북태평양은 모두 악명이 드높지만 WNA라는 프림솔 마크가 따로 존재하는 겨울 북대서양이야말로 까칠한 바다의 진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엊그제 비스케이만을 지나면서 시작된 이 무지막지한 바람으로 다들 피곤에 절어 좀비 꼴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나마도 공선 항해라 몸으로 느끼는 피곤함이 더한 듯합니다. 짐이나 가득 실은 상태였다면 이렇게 가볍게 통통 튀는 롤링은 하지 않을 텐데 4번 홀드를 발라스트로 가득 채운 HEAVY BALLAST상태라곤 해도 덩치에 맞지 않게 이리저리 뒤틀리는 느낌은 언제 만나도 불쾌하고 힘이 드네요. AWT를 통해 받은 메시지에 따르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한 SWELL에 바람이 기다리고 있다니 선장님을 비롯해서 다들 변침도 심각하게 고려중입니다. 선속도 어제의 반토막으로 기어가는 중이라 차라리 변침해서 다들 몸이나 추스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체념뿐이죠. 이래저래 몸도 마음도 악천후에 너덜너덜 변해가는 기분입니다, 다들.
그래도 어제, 본선에서는 최초로 실시된 '선상 부재자 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기표소도 설치하고 참관인까지 세우고... 승선 생활이 수십 년에 접어드는 베테랑 직장들도 배 위에서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현실에 상전벽해를 느끼는 모양입니다. 세상이 좋아지기는 좋아졌죠. ^^ 덕분에 저는 당직 시간을 넘겨가며 기표용지를 선관위로 위성 전송하고 뒷정리를 해야 했지만 늘 제삼자, 주변인으로 머물던 뱃사람들이 당당하게 주권을 행사하게 된 현실이 실로 의미 있게 다가 왔습니다. 다들 투표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포즈도 취하고...
이런 현실이 아버지께도 새삼 감개가 무량하게 다가오시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13일부터 여론조사 결과도 공포되지 않는 '깜깜이 시간'이 시작될 고국과 달리 선상 부재자투표는 오늘, 14일까지 계속됩니다. 이 메일이 도착할 때쯤이면 마무리될 듯하네요.
어제 용선주에게 날아온 메일로 배는 또 이런저런 감정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현재 베네수엘라 PUERTO ORDAZ에서 짐을 싣고자 하는 배들이 VERY LONG TIME WAITING에 걸려있다는 소식이었죠. 심할 경우 석 달 정도의 웨이팅도 예상된다는 소식에 기관부는 조수기를 FULL로 돌리고 사주버리는 이제 한 달치 빠듯하게 남은 부식에 근심이 늘어가게 되었죠. 본선 실항사는 다음 달 9일에 1년간의 실습을 마치게 되는데 선장님은 만약에 웨이팅이 길어지게 되면 베네수엘라에서 연가 하선할 이들을 교대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지난 5월 승선한 이들이 그 대상이 되는데 교육이 겹친 저 역시 만약 웨이팅이 늘어질 경우 이곳에서 실항사와 다른 교대자들을 이끌고 내리게 될 듯합니다.
원래는 다이렉트 접/이안을 마치고 싱가포르에서 하선할 계획이었는데 서브 차터러의 계획이 또 달라진 모양이네요. -_-;; 뭐 어디서 교대하든 상관은 없는데 장시간 비행기 여행이 지겨워진 터라 살짝 근심이 생기긴 합니다.
하여간 요즘 제 근황이 이렇습니다.
모쪼록 안팎이 모두 뒤숭숭한 상황이지만 모든 가족들이 건강하고 씩씩하게 이 상황을 헤쳐나갔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