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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Feb 27. 2021

리옹에서의 내 방

에세이

화장실이 딸린 두 평 남짓한 방. 철제 침대 하나, 나무 책상 하나, 지퍼로 여닫던 비닐 옷장 하나. 복자이모가 만들어준 고추장볶음의 냄새가 스며 나오던 작은 냉장고와 침대에 누워 올려다보면 하늘이 가득 차던 창문. 그 창문을 열고 잠이 든 날이면, 밤새 켜 둔 조명에 하루살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곳. 스마트폰도, 노트북도 없던 시절, 태어나 처음으로 외국 땅에서 혼자 지냈던 기숙사 방이다. 나는 가끔 외로움에 대해 생각할 때면 아득히 먼 그 방이 떠오른다.


기숙사 근처에 있던 버스 정류장에는 매일 아침 무서운 아랍계 꼬마들이 득실댔었다. 그 꼬마들은 언제나 날 보고 배실배실 느끼하게 웃었다. 너 같은 동양인을 많이 보아왔다는 듯이.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낯선 곳에 어색하게 서있는 내 작은 어깨를 감지했다.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얼굴이 작고, 눈이 큰 외국인 여자애가 기억이 난다. 예쁘장한 외모와 당당함이 부러워 자꾸 눈길이 갔던. 그 여자애만큼은 아랍계 꼬마들도 쉽게 볼 것 같지 않았다.


나름의 좋았던 기억들도 있다. 삐걱대던 침대에 누워 썼던 일기(육심원의 얼굴이 그려진 주황색 노트)나 재밌게 읽었던 에밀 졸라의 소설, 포스터를 파는 가게에서 샀던 훈데르트바서의 엽서 같은 것들.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리옹의 그 방으로 데려가는 물건들이다. 프랑스어 공부의 재미를 처음 느꼈던 것도 그때 그 방에서였다. 당시 나는 약간은 주눅이 든 채 대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외국어 고등학교를 나온 동기들은 유창하게 프랑스어를 듣고, 말하고, 썼다. 나는 겨우 겨우 수업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리옹에 가서 처음으로 열정을 쏟으며 공부를 했고, 나름의 성적도 받았다. 같이 갔던 친구들과의 추억도 있다. 처음 먹어본 리옹 샐러드와 아비뇽 축제, 안시, 함께 나누었던 야한 수다들. 무채색의 시간에 빛을 드리우는 추억들이다.


나는 그곳에서 외로웠던 걸까. 지금 돌이켜보건대 그때 나는 외로움을 아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혼자였지만 외로움을 모르던 시절. 나는 가끔 외로움에 대해 생각할 때면 아득히 먼 리옹에서의 그 방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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