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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Feb 18. 2021

「Very Green」 전에서 본 노석미

전시 비평

주관적 착상과 객관적 이해의 간격, 혹은 이미지와 문자가 드러내는 의미의 차이. 그 틈에서 노석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유를 느꼈을 것 같다. 예술가들은 아마도 그럴 때마다 온전한 자유를 느낄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 앞에서 관객이 멈칫할 때 말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틈에서 관객들이 어색해하고, 당황해할 때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쉽게도(?) 그런 어색함과 당혹감을 경험할 수 없다. 노석미는 그 틈을 양보하는 대신 ‘공감’을 원했던 걸까. ‘Very Green(매우 초록)’이라는 타이틀의 이번 전시에서 그는 혼자 드라이브를 즐기며 보았던 화실 근처의 산들을 그린 작업을 내놓았다. 뾰족하면서도 세심한 시선은 거의 사라지고, 자연에 대한, 특히 푸르디푸른, 시원한 여름산의 인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세심함과 즉흥성은 상당히 다른 것이다. 마치 이성과 본능처럼. 그런 의미에서 노석미는 최근에 좀 변한 것 같다. 적어도 작업 세계에선. 노석미는 이를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말했다.)

그런 노석미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그의 행보 때문이다. 글과 그림 중 어느 것이 더 좋냐고 묻는 질문에 노석미는 그 두 일에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쓴다고 답했다. 그리곤 글을 쓰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가 글쓰기에 욕심을 지닌 듯 보였다는 표현은 지나친 걸까.(여기서 욕심이라는 말은 절대 부정적인 뜻이 아님을 밝힌다.) 그러고 나서 노석미에 대해 다시 돌이켜보면, 그의 글들이 그저 가볍게 쓴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동안 노석미의 글쓰기에 대해 재고해 보지 않았던 이유에는 물론 매체의 탓이 크다. (나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노석미의 글은 그림책이나 블로그, 인스타그램과 같이 비교적 가벼운 형식을 빌려 대중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기대하며 읽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다시금 노석미의 글을 상기해 보면 그동안의 회화 작업에서 보여왔던 노석미로서의 독특한 시선과 문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현재 “자연스러운 변화”를 맞이한 노석미는 화가와 작가 외에 또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까. 글과 그림의 어색한 틈을 내보이던 작업에서 매우 초록한 여름 산을 펼쳐 보인 작업, 그 다음의 작업은 또 어떤 걸까. 그런데 이러한 변화를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드는 이상한 기대 같은 것이 있다. 그건 한 예술가의 변화를 반가워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 작가의 통일된 그 무엇. 다시 말해, 노석미라는 예술가를 관통하는 그 ‘무엇’에 대한 기대 같은 것.

나는 그 ‘무엇’을 감히 색에서 발견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인조적인 색감. 노석미는 작품을 구상할 때 색의 구성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색이 노석미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작업의 콘셉트를 정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이 색이라면 노석미는 색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더 질문을 이어가지는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이번 전시의 제목은 ‘매우 초록’이다. 노석미는 자연을 보고 화가로서 느끼는 순간순간의 산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여름 산이 아닌 여름 초록들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푸르른 산을 여름 초록들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그만의 색으로 표현하는 것. 혹시 그것이 노석미가 화가로서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내보인 그의 매우 초록한 산들 앞에서 관객들이 또 어떠한 반응을 할 때, 그는 또다시 온전한 자유를 느끼지 않았을까.


2017.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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