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내가 살던 집은 이따금 정전이 되었다. 정전만이 아니라 이곳저곳 빗물이 샜었고, 바퀴벌레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야말로 나이가 지긋한 단독 주택이었다.
그렇기에 우리 집에는 낭만적인 구석도 많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아래에는 화장실이 있었는데, 화장실의 천장은 계단의 비스듬한 구조를 그대로 따랐다. 심지어 반층 정도 내려가는 구조라서 노란 불빛의 화장실이 참 아늑했던 기억이 난다. 전체가 하얀색 타일로 채워져 있었고, 부분 부분 꽃 타일이 있었던 것 같다. 욕조가 놓여야 하는 자리에는 엄청 큰 갈색 고무대야도 있었다. 대야에 몸을 담그면 작은 창문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큰 이모와 함께 목욕을 할 때면 이모는 내게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바다의 왕자, 마린 보이. 푸른 바다 밑에서 잘도 싸우는 슬기롭고 굳세고 용맹스러운, 마린 보이 소년은 우리 편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인어 아가씨야! 마음씨 좋은 돌고래야! 정말 고맙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쓰던 1층 안방에도 나와 내 동생에게만큼은 낭만적이었던 공간이 있었다. 방에는 붙박이로 된 검은 자계 이불장과 옷장이 벽의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자계로 된 그림의 배경이 마치 용왕이 사는 바닷속 같았다. 거북이 등껍질의 매끈매끈하면서 울퉁불퉁한 감촉이 떠오른다. 나와 내 동생은 그 이불장에 들어가서 자곤 했다. 나무 냄새와 이불 냄새가 뒤섞인 포근한 장소였다. 숨바꼭질도 수도 없이 했다. 조금 열린 문틈으로 방 안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등장인물은 주로 침대에 누워 TV를 보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누워있을 때 늘 한쪽 팔을 하늘로 쭉 뻗고 있는 습관이 있었다. 운동을 전혀 안 하던 할아버지가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나름으로 고안한 자세였다.
부엌 옆에 딸린 겨우 2평 남짓한 작은 방도 특이한 공간 중 하나였다. 평상시에는 안 쓰는 이불이나 옷가지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다 1년에 한두 번 지내던 제삿날에는 그 방에 밥솥이 들어가고, 노오란 전들이 진열되고, 기름떡이 보관된 낭푼이 놓였다. 아마도 부엌이 협소해 그 작은 방까지 음식들이 침범한 것이었을 거다. 그 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날이면 온 집안에 사람들이 그득그득했던 날이었다. 할머니들, 아줌마들, 담배 냄새나는 남자 어른들, 아이들이 모두 시끌벅적 우리 집에 모였다. 나이 많은 우리 집도 그런 날에는 덩달아 활기를 찾았다.
우리 가족은 우리 집을 '사천 번'이라고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우리 집 전화번호의 뒷번호가 4000번이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종종 사천 번을 그리워한다. 아니, 아마도 우리 가족 모두가 그곳을 그리워할 거다. 나는 기억을 모으고 모아 우리 집을 추모하고 싶다. 그게 나의 일인 것 같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