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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Aug 02. 2023

신성한 물

할머니의 친구분들 중에는 '고정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가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그 할머니를 ‘정인이 할머니’라 불렀다. 정인이 할머니는 작은 키에 넙데데한 얼굴을 가졌는데, 두 눈이 커서 그런지 어딘가 부엉이를 연상케 했다. 할머니의 중저음 목소리와 큰 눈으로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곤 했다. 정인이 할머니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두 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다. 내가 정인이 할머니의 인생 스토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두 번째 남편을 소개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정인이 할머니는 우스갯소리로 당신의 소원은 마지막 남편을 당신보다 먼저 떠나보내지 않는 거라 말하곤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말을 들을 때면 나는 할머니의 길고 길었던 인생의 시간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듯했다.  


정인이 할머니는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집에 '신수'라는 걸 가져오셨다. 신수? 신성한 물? 신의 물? 뭐라 해석해도 상관없었다. 작고 검은 병에 담긴 그 신묘한 물은 건더기가 하나 없는 투명한 액체로 약간 쓴맛이 나고, 염증을 제거하는 데에 탁월한 효능을 지녔다고 했다. 정인이 할머니의 친동생이 제주 향토 음식 장인으로 꽤 유명한 분이라고 하시니 두 분이 합심하여 고안해 낸 것일 수도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내게 재밌는 건, 우리 집 어른들이 그 신수를 대하는 태도였다. 나는 '신수'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져서 우리 할머니께 도대체 무슨 약재를 끓인 것인지 여쭤보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무심하게 "아마 좋은 것들이 들어갔을 거야."라며 '신수'라는 이름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은 눈에 다래끼가 날 때면 눈에 신수를 넣기 일쑤였고, 특히 목감기가 걸릴 때면 줄기차게 그 신수를 마셨다. 신수가 담긴 병의 뚜껑에는 유리로 된 스포이트 같은 것이 달려있어 눈이나 목에 몇 방울씩 떨어뜨리기 좋게 만들어져 있었다. 나로서는 신수가 정말 효험이 있는지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어 의심이 갔지만, 우리 집 어른들의 신수에 대한 믿음은 정말이지 진심 그 자체였고,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 8박 9일로 파리 여행을 다녀왔다가 코로나에 걸려 혼자 방에 격리되어 있을 때도 엄마가 내게 제일 먼저 가져다준 약은 다름 아닌 신수였다. 첫째 이모도 굳이 전화로 목이 아플 때는 신수가 제일 효과가 좋다며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말을 보탰다. 신수는 정말 효능이 있긴 있는 걸까.


나는 신수에 대한 가족들의 순수한 믿음을 지켜보며 그런 어른들이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문득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물론 떡하니 당신이 만든 물에 '신수'라 이름 붙인 정인이 할머니의 자신감도 우리 가족들의 믿음을 굳이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그 물은 누가 뭐래도 정인이 할머니만의 민간요법과 인생 경험, 지혜가 집약된 것이었다. 누구도 어떤 재료로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인이 할머니를 오랜 세월 알아온 이들에게는 할머니에 대한 믿음이 신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기실 신수에 직접적인 효능이 있든 없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플라세보 효과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그저 우리 집구석 어딘가에 신성한 물이 있어 언제든 탈이 나면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는 것이리라. 할머니 손은 약-손. 그건 어쩌면 자명한 진리다. 할머니들의 정성과 사랑은 그 어떤 약보다도 용한 효능을 지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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