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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Sep 15. 2023

인스턴트 커피

1. 동생과 나는 얼마 전부터 인스턴트 커피를 끊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인스턴트 커피와 나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커피 포트 대신 빨간색 주전자를 쓰던 시절이었다. 그 주전자는 물이 끓기 시작하면 “삐이이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었다. 믹스 커피가 요즘처럼 대중화되기 이전, 프림과 설탕, 커피가루로 인스턴트 커피를 직접 제조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옛 부엌의 진한 에메랄드색 가구들이 생각난다. 소쿠리와 바구니가 가득하던 작은 다락도. 그곳에 오르려면 에메랄드색 서랍장 위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어른들은 가벼운 우리에게 다락의 물건을 꺼내달라 부탁하곤 했다. 유난히 긴 부엌의 중심에 자리하던 그 서랍장 위에는 노상 프림과 설탕, 커피가루가 담긴 꽃무늬 도자기가 놓여있었다.


다 함께 저녁식사를 한 후면, 엄마는 목청 크게 "커피이-"하고 내게 외쳤다. 그 목소리에는 언제나 딸을 키운 보람이 가득 차 있었다. 엄마, 할머니, 이모 둘, 가끔은 할아버지까지(아빠와 삼촌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는 날이 드물어서 커피 심부름에서 제외되었다.). 프림 두 스푼, 커피 한 스푼, 설탕은 크게 두세 스푼. 컵도 각자가 어울릴만한 짝이 다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인스턴트 커피는 손님용 커피잔에 받침까지 갖추었다. 거구의 우리 할아버지는 꽃잔과 의외로 잘 어울렸다. 한 손으로 예쁜 잔의 얇은 손잡이를 잡고 입술을 쭉 내밀어 호록 호록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아릿하다. 성격이 급한 엄마는 단숨에 커피를 들이키기 일쑤였고, 우리는 그 모습에 매번 놀라곤 했다. 모두가 만들어낸 북적거림과 시끄러운 주전자 소리, 인스턴트 커피의 향이 사방으로 번지던 시간이었다.


2. 동생과 내가 인스턴트 커피를 끊기 몇 달 전, 엄마는 커피 자체를 아예 끊었다. 엄마에게도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 요즘 엄마가 빠져있는 건강 관련 유튜브에서 보았을 수도 있고, 신문기사에서 읽었을 수도 있고, 친구들이나 사무실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우연히 나왔을 수도 있다. 그저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증상에 카페인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단번에 금연에 성공한 사람처럼 엄마는 자신이 커피를 끊은 걸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 아이 같은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다만 엄마는 커피 대신 식후에 바로 아이스크림을 찾는다. "아이스크림 하나만!" 하는 엄마에게서 "oo야, 커피이!"하고 외치던 오래 전의 엄마가 교차한다. 엄마의 목소리에는 이제 애교스러움이 가미되었다. 딸에게 의지하고픈 늙은 엄마의 작은 바람이 추가된 것 같다. 그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오늘따라 다디단 인스턴트 커피 하나로 모두가 행복했던 그 수많은 저녁들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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