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 먹으면 특별해지는 육아
태린이를 데리고 갑자기 집을 나섰다. 이런 유형의 떠남도 좋아한다. 무작정 나가고 보는 식인데 정처 없이 걷기부터 시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여행의 흐름이 생겨 빠져들게 된다. 겁 없다고 흉을 볼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나다. 나에겐 이런 선택이 익숙하다. 더구나 아기와 단둘이 여행은 꿈꿔왔다. 신랑이 내 머리에 기저귀 뭉치를 떨어트리고 사과를 안 했으니 고민도 없이 떠날 명분도 생겼다.
아기가 어리다는 이유로 "여행을 못한다" 혹은 "안 한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할 일. 나에게는 그렇다. 애가 클 때까지 여행을 자제하라고? 여행을 종종이라도 해야 숨통 트이는 사람들에겐 산소 없이 삶을 살아가라는 말이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몸을 사렸고 참을 만큼 참았다. 일상 여행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로 아기와 시간을 보냈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순간이 결국 온다. 오늘은 문화센터, 내일은 친구 집, 모레는 키즈카페 아니면 백화점을 내 집처럼 드나들곤 하고 집 앞 산책로와 놀이터에 매일 발도장을 찍으며 일상을 보내지만 지친 마음이 쌓이고 쌓이면 어디든 멀리 가고 싶어 진다. 독박육아는 그만큼 눈물 나게 외롭다.
누구도 구속하지 않을 먼 곳을 원했다. 그래야 우리 만의 여행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리고 바다로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의 위안을 준 윤동주 시인의 '산골물'이 자극제가 됐을까? 그래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하늘의 뜻이었는지 비행기표는 저렴했다. 국적기 편도 행 티켓이 2만 원대. 비상금 여행자에게 행운의 신호가 틀림없었다. 당일 구매할 티켓도 남아 있으니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당시 장롱면허 상태였지만 하루에 한 곳만 버스로 이동해 시간을 보내도 우리에게 제주 여행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티켓을 결제하고 남은 시간 짐을 부리나케 꾸렸다. 경중을 가릴 시간이 없다면 마음껏 싸기로 했다. 짐이란 적을수록 좋다지만 아기 짐은 적을수록 왜그리 불안감이 커지는지 모르겠다. 여유 있게 안 챙길 때 꼭 부족했던 징크스를 떠올리며 기저귀 짐을 두 배로 늘렸다. 해외도 아니었고 제주도에도 대형 마트가 많은데 왜 굳이 기저귀까지 바리바리 싸갔는지 돌이켜 보면 우습지만 그만큼 만원이라도 아끼고 싶었던 마음을 기억한다. 집에서 김포공항까지, 제주공항에서 숙소까지는 택시를 탈 생각에 중형 캐리어와 유모차를 과감하게 들고 집을 나섰다.
아기 접시랑 포크는 두 개씩 들고 갈까? 아기 주방세제는 필수지.
세탁세제는 가져갈까, 말까. 내복은 얼마나 가져갈까.
세탁세제는 가져가도 빨래가 빨리 안 마를 수 있어. 내복도 외출복도 여유 있게 넣자.
제주에서 유모차를 쓸 일이 있을까? 내 허리는 소중하니깐 조금이라도 덜 안으려면 가져가야 해.
유모차는 좀 무리지 않을까? 아니야, 애를 재워야 할 때도 잘 때도 필요하니 가져가자.
우중충한 김포공항 분위기를 이겨내고 그토록 바라던 제주 바다를 만났다. 바다 냄새를 본능적으로 알아챈 걸까? 엄마 품에서 고이 자던 아이는 초롱초롱 해맑게 눈을 뜬다. "여긴 바다야. 바! 다!"라고 말해주는 순간 "바아~"라고 따라 한다. 아이 목소리를 듣고 잠시 귀를 의심했다. 말을 쉽게 따라 하지 않았던 아이가 신났다. 바다를 향해 뛰어간다. 바람을 마주하며 질퍽거리는 모래를 걷는데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평생 바람맞을 순간이 얼마나 많은데 이 작은 아이는 벌써 센 바람을 즐긴다. 강하게 키우고 싶은 엄마지만 당황스럽기도 하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이날처럼 웃으며 이겨 내길 아이 뒷모습을 보며 기도했다.
아이는 먹기도 잘 먹었다. 여행 내내 잘 먹은 일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기적이었다. 새로운 음식을 접할 때마다 바닥에 던져 버리던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동문시장 골목에 있는 허름하지만 정겨운 국숫집에서부터 조짐이 좋았다. 소고기만 먹었던 녀석이 돼지고기를 냠냠 쩝쩝 씹어댔고 장난만 치던 국수도 연신 집어 입에 넣었다. 고기국수는 내가 먹어도 유명한 대형 음식점보다 맛있었다. 아기한테 줄 멸치국수를 따로 한 그릇 퍼주시니 인심도 감사했다. 아기 먹는 모습에 가게 식구들도 미소 지으셨다. 과일주스도 처음 먹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사 온 귤 주스를 줬더니 쭉쭉 들이켰다. 장염 기운만 없었다면 제주에 머무는 동안 수시로 먹였을 텐데 그 점이 참으로 아쉬웠다. 여행은 어떻게든 아이와 엄마를 배부르게 한다.
여행은 또 다양한 놀이를 경험시켜준다. 카페 같은 정적인 공간은 아이에게 지겨울 수 있지만 우리가 갔던 카페들은 대부분 바다가 보이고 공간 여유가 많아 그런지 아이가 답답해하지 않았다. 카페 곳곳을 돌아다니며 진열된 소품을 슬쩍 만져 보기도 하고 나란히 놓인 의자를 두드리며 시간을 보냈다. 아기의 북 치기 놀이에 다른 손님들도 물개 박수를 쳐주니 딸은 더 신이 났다. 카페에 강아지나 고양이라도 있으면 동물 애호가 딸은 엄마에게 자유시간을 준다. 산책길에서 만난 애완견들과는 만남이 짧은 편인데 이곳에선 오래 들여다볼 수 있으니 몰입도가 높았다. 아이랑 다니다 보면 놀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순발력을 발휘해야 한다. 빨대도 놀잇감 중 하나였다. 컵 구멍에 빨대를 넣는 모습을 보여줬더니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는 딸은 꽂기 놀이에 집중력을 발휘한다. 어느새 빨대 5개를 한 구멍에 깔끔하게 꽂는다. 덕분에 나는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쉬어갈 수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는지 카페에서 숨 고르기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저 바다를 만나러 갔던 우리 모녀는 제주에서 기대치 못한 일몰 선물을 받았다. 제주에 머문 이틀 내내 우아한 자태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해를 만났다. 첫째 날은 제주항이 보이던 올레길에서 숙명적인 인연처럼 마주쳤다. 아이가 잠든 터라 혼자 여행하는 기분을 누리며 훌쩍 떠난 순간을 감격스럽게 받아들였다. 한편으로 아이가 예쁜 하늘을 보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그 마음을 하늘이 읽으셨는지 다음 날엔 우리는 전날보다 더 멋진 하늘을 만났다. 우리의 마지막 저녁이었다. 오래된 골목길 사이사이 이끌린 대로 걸어 내려오다가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테마거리까지 내려왔는데 이날 따라 낮잠을 못 자고 보채던 아이는 유모차에서 내려주는 순간 표정이 180도 달라진다. 노을빛 조명이 마음에 든 건지 확 트인 공간을 보고 흥분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웃음을 되찾으니 엄마는 그냥 좋았다.
숙소와 가까웠던 동문시장은 우리에게 맛있는 추억을 남겨줬다. 매일 발도장 찍었던 바다는 지친 마음을 지그시 일으켜주었다. 나는 육아의 고통을, 딸은 단유의 충격을 안고 있을 시기라 바다가 주는 기운이 그저 감사했다. 노을로 물든 하늘과 길은 미래에 펼쳐질 우리의 또 다른 여행을 축복해 주었다.
이렇게 2박 3일 우리의 첫 여행은 가슴 벅차게 마무리됐다. 애만 아프지 않아도 성공이다. 장염 기운이 약간 있었는데 밖에선 응가를 전혀 하지 않았던 딸, 바람을 많이 맞아도 감기 하나 걸리지 않은 딸, 엄마의 지친 마음에 끌려온 너인데 나보다 더 신나 했던 기특한 딸. 딸에게 반성을 했다.
오늘도 널 보며 엄마가 웃을 수 있는데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다시 힘낼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