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 이벤트가 만들어 준 추억
태린아, 우리 급하게 파리로 갈지 몰라!!
에펠탑 앞 잔디밭에서 실컷 뛰어놀게 해줄게.
센강에서 배도 타자~
몇 날 며칠 흥분해서 아이에게 말했다. 태린이가 20개월 때였다. 한겨울에 파리를 가도 불태울 자신이 있었다. 첫날 저녁엔 샹젤리제 거리로 나가 크리스마스 장식을 볼 작정이었다. 마법에 걸린 듯한 파리의 다채로운 빛을 아이 눈에 넣어주고 싶었고 사방에 퍼진 빛줄기 아래 회전목마를 태워 손을 높게 흔들어주는 상상을 했다. 아이들이 북적거릴 거리에서 프랑스 친구들을 만나면 태린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다. 베르사유 궁전 정원과 벵센 숲 파리 동물원(Parcs zoologogique de Paris), 과학산업 박물관(Musée Cité des Sciences et de L’industrie) 내 어린이 박물관(the cite des Enfants) 정도는 매일 한 군데씩 데려가고 싶다는 러프한 계획도 있었다.
겨울이 아니라도 아이랑 파리를 간다는 사람이 있으면 십중팔구 말린다. 많이 걸어야 하고 해도 잘 안 뜨는 도시라 그런 점에선 아이와 떠날 여행지로는 별로 일지 모른다. 우리 모녀에겐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비행기에서 단둘이 보낼 긴 시간은 막막했지만 그 걱정이 파리 여행을 막을 순 없었다. 떠나기만 하면 그 자체가 행복이니깐. 내 몸이 고될지라도 한국에 돌아와 뻗고 말면 그만이었다.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파리와 나는 만날 때마다 티격태격했던 사이. 그러나 돌아오면 이상하리만큼 그리운, 희한한 녀석이다. 당시 디뮤지엄에서 열렸던 <파리지앵의 산책> 전시를 보는데 파리가 갑자기 보고 싶어 졌다. 아이와 파리 거리를 걸을 생각에 설레어서 이제는 거부감 하나 없이 파리를 받아들일 것만 같았다. 아이랑 가니 예전보다 여유롭게 즐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파리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운명 만으로 감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티켓도 없는 주제에 당연한 듯 짐을 꾸렸다. 진짜 간다는 보장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처럼 가볍게 챙겨갈 법도 한데 필요한 물품을 현지에서 살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꼼꼼하게 준비했다. 돈도 없으면서 파리까지 간다니 뻔뻔한 내 모습에 피식 웃기도 했다. 기타 지출을 최대한 줄여야 하나라도 더 사 먹을 수 있으니 기저귀와 카메라, 아기 옷과 식기 정도는 고민도 없이 챙겼다. 어느새 27인치 캐리어가 가득 찼다.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과 각종 영상이 담긴 아이패드는 책가방에 넣었다. 아이 짐을 싸느라 정작 내 것은 옷 한 벌과 장갑, 속옷이 전부였다.
여행에 목마르던 내게 불씨를 피운 존재는 에어프랑스 항공사다. 재작년 겨울 에어프랑스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 어울림 광장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열었다. 사전 등록자 700 커플을 모아 놓고 딱 두 팀을 추첨해 바로 파리로 보내주는 내용이었다. 서울 서쪽 끝자락에 사는 나는 파리에 앞서 동대문까지 머나먼 여행을 떠나야 했다. 강추위가 제대로 닥친 날이었다. 신랑은 당연히 말렸다. 700분의 1의 확률을 뚫기는 하늘의 별따기라며 언젠가는 본인이 꼭 따로 보내주겠다고 공수표를 날렸다. 홍콩을 보내준다고 각서까지 써놓고 세 번이나 비행기를 취소했던 터라 신랑 말을 흘려 들어버렸다. 거침없던 나를 막을 자가 없었다. 이벤트 주인공이 나일 거라 굳게 믿었다.
파리로 바로 떠나야 하니 자동차는 집에 두고 가야 했다. 지하철 역이 집 앞에 없어서 동대문까지 택시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좋아하는 폴(Paul) 베이커리에서 빵과 커피를 세 번 더 사 먹을 비용일 테지만 하필 한파가 불어닥친 날이라 아이 감기 걱정에 과감한 투자를 했다. 택시를 타고나니 아이만큼은 고생을 덜해서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네이버 실시간 내비게이션이 예상한 시간 내에 도착할 거라 확신이 있었다. 평소 20분 정도 걸리던 영등포까지 45분이나 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짐을 넣다 뺏다를 반복하느라 빨리 출발하지 못했던 나를 반성했다.
<택시 안 에피소드>
출발할 때만 해도 기사님은 행사가 시작될 오후 2시쯤엔 도착할 거라고 장담하셨지만 시간이 다가오니 불안했다. 결국 기사님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주문했다. 그때, 함께 하기로 한 프랑스어 스터디 멤버들이 희망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후 2시부터 입장을 시작해서 먹을거리가 나오고 사회자가 나와 행사부터 진행하고 있다고. 그 말인즉슨,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는 티켓 추첨을 할 가능성이 적다는 이야기다.
ㅁ 나: (비장한 목소리로) 기사님, 다시 동대문으로 가주세요.
올림픽 대로로 향하는 직진 신호를 기다리다 집으로 가려고 우회전으로 돌아서던 찰나, 직진 방향으로 재빠르게 붙어도 되는데 우회전을 해서 복잡한 길을 굳이 돌아오신 단다.
ㅁ 나: (울먹이면서) 그냥 직진 쪽으로 붙이셔도 될 텐데....
ㅁ 기사님: 교통규칙에 어긋날까 봐.
나도 모르게 한숨을 계속 쉬어 댔다. 돌려 섰던 직진 신호 앞에 다시 왔다. 1분도 소중할 판국에 10분을 버렸다. 평일인데도 올림픽대로는 막혔다. 기사님께 융통성이 생기길 바라며 더더욱 다급한 액션과 멘트를 날렸다.
ㅁ 나: 기사님, 사실은 오늘 제가 파리를 가요. 2시까지 체크인을 마쳐야 했는데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요. 몇 명 기다려주고 있다는데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네요.
ㅁ 기사님: 파리를 가려면 인천공항에 가야 하지 않나요?
ㅁ 나: 아... 항공사에서 보내주는 건데 여기서 모여 같이 움직인다네요. 늦은 사람들 지금도 받아준다고 하니깐 가보기는 하려고요. 티켓이 너무 아깝잖아요.
ㅁ 기사님: 아, 그런 것도 있네요.
그럼에도 차 한 대 추월하지 않고 안전 운전을 하셨다. 그렇게 한강을 건너 장충단 길로 들어서기까지 1시간 반이 걸렸다. 그때, 2시 40분까지 체크인 절차를 마친다는 소식을 접했다.
ㅁ 나: (현장에 있던 멤버와 통화하면서) 2시 40분까지만 가면 된다고요?
ㅁ 기사님: (통화 내용을 같이 들으시고선) 이제 다 왔어요. 여기서 5분 안에는 갈 수 있어요.
체크인 시간을 2분 남겨두고 DDP에 도착했다. 태린이도 그때 잠에서 깨어났다.
기사님께 화를 내진 못했다. 그저 교통규칙을 어떻게든 지켜가며 운전하시는 연세가 있는 분이었다. 차를 탈 때 무거운 캐리어를 흔쾌히 실어주신 것처럼 내리는 순간에도 누구보다 먼저 움직여 주셨다. 그래서 잔돈 2000원을 받지 않고 감사하다는 말을 드렸다. 어쨌거나 2시 40분 안에는 도착했으니깐 말이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체크인 장소를 향해 무작정 뛰었다. 애를 안고 중형 캐리어를 끌고 미친 듯이 스태프한테 달려갔다. 2시 39분이었다. 스태프는 막 체크인을 마무리했다고 했다. 길게 늘어서 있던 승무원들도 일제히 노트북을 덮기 시작했다.
ㅁ 나: (숨이 너무 찬 상태로) 2시 40분에 마감한다고 해서 이렇게 왔는데.. 아직 1분 남았는데...
ㅁ 스태프: (애 안고 뛴 모습을 다시 떠올린 건지) 여권부터 보여주시겠어요? (승무원에게 우리를 보내며) 여기 한 분 더 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애를 안은 채 뒤로 발라당 자빠졌다.
우여곡절 끝에 행사장에 들어가 추첨번호를 받았지만 행운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동대문까지 고된 여정이었지만 체크인을 성공했다는 사실 만으로 기뻤다. 파리는커녕 동대문이면 어떠하리. 파리를 향한 나의 집념을 생각하니 정말 미친 듯이 웃음이 나왔다. 정말 많이 웃었다. 추억을 나눈 스터디 멤버들과 함께라 돌아가는 길도 행복했다. 짐을 싸서 출발하는 그 두근거림이 파리를 실제 다녀온 기분만큼 좋았다.
두 돌도 안 된 아기가 파리를 굳이 경험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딴죽을 걸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파리의 기운을 믿었을 뿐이다. 오래전부터 세계 유명한 예술가들이 파리의 향기를 맡으며 작업하던 이유가 있으니깐. 파리가 주는 감정과 상상력이 아이를 더 많이 느끼고 표현하도록 이끌어 줄거라 믿었다. 이렇게 조그마한 아이가 금세 초·중·고 정규과정을 밟을 테고, 그 이후부터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게 아쉽다. 나도 눈 깜빡할 사이 30대 중반이 됐는데 내 아이도 그렇게 훌쩍 커버릴 테니. 시간이 무섭게 대학도 가고 결혼도 하고 엄마도 될 생각 하면 내게 주어진 '지금의 시간'이 각별하다. 우리가 함께 자유롭게 뒹굴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매일 같이 태린이를 데리고 놀러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넓은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름다운 영감을 받길 바라본다. 서울 하늘과 지구 반대 편 하늘을 다르게 느끼고 흥분에 벅찬 딸아이를 상상해 보며 동대문 해프닝을 예쁘게 추억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