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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수니 Jun 02. 2018

전라도에서 남긴 진한 추억

언제 일 지 모를 마지막을 위해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친정아빠의 폐암 판정. 태린이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를 할 때였다. 누구보다 건강했던 사람이 우리 아빠였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지인 도움을 받고 국내에서 최고라는 흉부외과 권위자를 찾아가 치료부터 시작했다. 증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자 폐암 3기였던 아빠를 어떻게든 살릴 생각만 했다. 영화 <클레멘타인>에서 경기 도중 쓰러진 아빠를 향해 딸 사랑이가 "아빠 일어나-!"라고 외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를 다 보진 않았지만 눈물에 젖은 아역 배우 목소리가 내 마음에 수시로 울려댔다. 암세포가 가슴 중앙에 퍼져 나갈 기세인데도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힘들다는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았던 아빠 심정을 알기에 "부디 살아달라"는 바람은 가슴속에만 저장해둬야 했다.



하루 종일 곁에 있으면서 잔심부름도 하고 먹는 것도 챙겨드리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병원살이를 시작한 아빠를 수시로 찾아 재잘재잘 거리는 것이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판을 치고 있을 시기였는데 하필 강남삼성병원에 머물던 아빠를 보겠다고 6개월짜리 태린이를 데리고 몇 번이나 병원을 드나들었는지 모른다. 어느 병원으로 가던지 열 체크는 기본이었고 어린 아기를 보며 간호사들은 호흡기 병동이니 되도록 오래 머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우리에게도 소중한 아빠 폐 한쪽이 잘려 나가는 동안에도 태린이와 함께 수술 대기실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묵주를 돌려가며 "조금 더 있다가.."라는 말을 반복하며 최대한 자리를 버텼다. 우리 아빠가 우리 딸만큼 소중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술 날 아침엔 이유식을 막 시작한 아이 모습도 보여드렸다. 가족들도 차마 말리지 못했다. 태린이 자체가 아빠에게 희망이었으니깐. 태린이를 바라보며 살려고 애쓰시는 것 같았는데 그런 아빠 눈빛을 슬쩍 읽을 때마다 가족 모두 슬픔도 눈물도 꾹꾹 눌러 삼켰다.



수술 이후 한 달 동안 인근 병원에 입원 중이셨을 때 고민 없이 병실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병원에서 외출을 하실 수 있으면 같이 따라나섰다. 각종 치료로 지쳐가던 아빠를 위해 동구릉 산책을 했던 날은 날씨부터 참 좋았다. 복잡한 강남대로가 사람도 차도 하나 없이 뻥 뚫린 날이기도 했다. 햇살 좋은 날 돗자리도 깔고 먹을거리도 챙겨 잔디에 뒹굴거렸다. 태린이가 경험한 생애 첫나들이였다. 무서운 메르스 때문에 아무도 바깥활동을 하지 않던 때라 우리가 동구릉을 통째로 전세 낸 것 같았다. 아기한테 미안하면서도 '메르스 네까짓 껏'이라고 애써 무시했던 이유는 아빠가 어떻게라도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길 바라서다. 아빠는 메르스가 기승을 부리던 동안 폐렴까지 덮쳐 정말 위험할 뻔했다. 메르스 검사도 두 번이나 받았다. 한편으론, 아빠를 잃을까봐 이렇게라도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무서움이 들이닥쳤던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건강하셨던 분들이 그렇게 하늘로 가셨으니깐 말이다.

 


장성에 위치한 편백나무 펜션 예락원. 이 건물 뒤에는 별채도 있고 사장님이 손수 만드신 흑토방도 있다.



이후 친정아빠는 고된 항암치료와 생사를 오갔던 대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장성에 있는 펜션에서 요양을 하셨다. 편백나무로만 지어진 펜션이었는데 이곳서 두 달 머무는 동안 우리 세 식구도 자주 내려가 장성은 물론 고창, 영광, 정읍 등 인근 지역을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펜션 뒷길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편백나무 숲이 나왔다. 거기서 텐트를 치고 시간을 보내면 우리가 이곳에 왜 있는지도 금방 잊곤 했다. 그렇게 아름답다는 백양사 단풍과 내장산 단풍을 직접 눈에 넣었고, 말이 필요 없이 훌륭하다는 전라도 음식을 입에 넣었다. 끼니마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전라도 손길은 예술이라고 나는 호들갑을 떨었다. 예외는 있었다. 백양사 입구 쪽 가게에서 맛본 더덕정식은 용돈 아끼겠다고 먹었던 학교식당(일명 학식) 밥보다 맛이 없었다. 그런데도 긍정의 아이콘 아빠는 나물무침은 먹을만하다며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셨다.



천생연분 두 사람.

공기 좋은 곳에 머문 덕분인지 아빠 기력도 점점 좋아졌다. 눈 뜨자마자 손녀부터 찾고 체력이 닿을 때까지 태린이를 안아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구절초 축제를 갔을 때였다. 산에 올라가며 사방에 퍼진 구절초를 구경하는 길에도 태린이를 안고 다니셨다. 아가 때부터 카메라 기피증이 있던, 까칠이 태린이는 할아버지랑 함께라면 이쁜 미소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혼자서도 자주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청하셨다. 고급지고 멋진 사진사가 우리 신랑이었으니 그거 하나는 제대로 효도가 됐구나 싶다.



팔딱거리는 손녀를 바라보는 미소는 강력한 자가치료제가 됐다. 틈만 나면 아이를 들어 올렸고, 서고 싶은 욕구를 채워주려고 손을 잡아준 채 눈을 맞추며 놀아주셨다. 그 마음을 아는지 태린이가 제일 먼저 뽀뽀해준 사람이 엄마도 아빠도 아닌 할아버지였을 정도다. 태린이는 7개월 전부터 "하부지 어딨지?" 물어보면 1초 만에 할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려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그 정도로 둘 사이는 각별했다. 그런데 웬만해선 힘들다는 소리를 안 하시는 아빠도 놀아주시다가 "태린아, 할아버지 이젠 힘드네. 엄마한테 가자."라고 하는 순간이 오긴 왔다. 마지막 힘까지 태린이한테 쏟으셨구나 싶었다.


 한쪽이 없으면 호흡이 절반으로 어 일상생활부터 벅찰 수밖에 없다. 조금만 걷거나 무리해도 숨이 헉헉 차고 지친다. 아빠도 그랬다. 아빠 몸속에 있던 암세포들은 의료진 예상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폐 근처로 전이될 기세를 보이던 암세포를 처리하려고 수술 전 방사선 치료를 한 달 넘게 받았는데 워낙 건강했던 아빠 폐에선 암세포들이 대동단결이라도 하듯 단단하게 뭉치는 일이 발생했다. 너무 단단해서 폐를 거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수술할 때 레이저로 지지면 제거되어야 할 암덩어리들이 플라스틱처럼 딱딱해져서 끄덕도 안 했던 것이다. 폐 한쪽을 아예 없애 원발암을 제거한 셈이라 암 재발 가능성은 매우 낮아지지만 폐렴 같은 질환이 닥치면 생명에 바로 지장을 주는 더 큰 위험을 껴안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몸이 조금이라도 피곤하거나 면역이 떨어지는 상황에 놓이면 감기도 쉽게 올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도 아빠는 자신이 가진 체력의 최고치를 태린이한테 쓰고 있었다. 수술한 지 두 달도 안 되신 분인데 외출할 때면 운전도 늘 아빠가 하셨다. 그렇게라도 가족의 중심에 서 있고 싶으신 것 같았다.



식사 후 가족들과 차 마시는 여유를 부리는 게 얼마나 값진 일인지 알게 됐다. 장성의 한정식 정자에서.



친정까지 멀어 제대로 독박 육아하는 나에겐 장성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았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우리 엄마 손길. 엄마가 많은 음식을 요술 부리듯 척척 만들어내면 우리는 기다렸다는 새끼 제비들처럼 모여 손가락부터 집어 들었다. 김치 하나도 실패가 없는 엄마는 아빠가 원하는 음식은 최대한 빨리 뚝딱뚝딱 만들어드렸다. 그러지 않아도 가족에게 밥 차려주는 일이 행복한 여자라 매끼 정성이 가득한데 남편 살릴 마음까지 더해져서 맛이 더 좋았다. 신랑도 나도 포동포동 살이 쪄갔다. 장성에선 장을 딱히 볼 곳이 없었던 터라 매일 같이 고창 마트까지 가서 이왕이면 좋은 재료를 사 오는 엄마 열정은 늘 존경스러웠다. 지금까지 워킹맘으로 살면서도 가족들 먹을거리를 위해서라면 누구보다 적극적이었고 한 끼도 허투루 먹이지 않았던 분이 우리 엄마다.



머물렀던 장성 펜션은 사랑방 역할을 했다. 신랑이 장기 휴가를 쓸 수 있던 덕분에 우리도 자주 내려가 있었지만 이곳에 연고가 없던 외가 식구들도 한 가족씩 시간을 내어 며칠씩 묵고 갔다. 논산에 계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직접 운전하셔서 이나 다녀가셨다. 엄마가 일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우고 포항 친정집에 가셨을 때 할머니는 큰 아들 같다던 아빠를 위해 냉장고를 채워주러 오셨다. 할아버지는 사위 보양시켜주시는 김에 손주 사위도 배불리 먹여주신다고 고창에 있는 백합 전문 식당에 데려가 모든 메뉴를 다 주문하셨다. 평생 먹을 백합을 그날 다 먹은 것 같다. 둘째 이모네가 내려오는 날은 사람 사는 맛이 났다. 이모부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빠에게 다정한 말동무가 되어 주셨고 오실 때마다 펜션 연못에서 낚시를 해 월척을 선보이셨다. 그 물고기로 엄마는 기가 막힌 매운탕을 끓여주셨다. 매일 같이 바비큐 파티를 열고 늦게까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날씨는 쌀쌀했고 바람이 불면 연기가 심해서 아빠를 조심시켜야 했지만, 시끌시끌 기분 좋게 고기도 대하도 굽고 고구마도 은박지에 싸서 구워가며 밤늦게까지 떠들고 놀았다. 이모들이 내려오면 맏이인 우리 엄마는 더 풍성하게 상을 채웠다. 실컷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 그것도 아쉽다고 펜션 사장님이 만드신 황토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장암 수술을 한 지 7년째인 둘째 이모는 이모부와 틈틈이 여행 다니며 추억 쌓기 중이었다. 이모가 결혼하기 전에 우리랑 살았던 정도 있지만 아빠한테 워낙 애교도 많은 이모라 아빠랑 함께 있을 때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됐다. 큰 수술을 이겨내고 밝고 건강하게 지내는 이모가 있으면 아빠도 편안해 보였다.



엄마가 포항에 잠깐 가셔야 했을 땐 우리 세 식구는 더 오래 장성에 있었다. 한창 알록달록 예쁜 단풍을 상상만 하라는 것인지, 닷새 연속 날이 흐리고 비만 추적추적 내렸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럼에도 우린 차를 타고 여기저기 잘 다녔다. 엄마가 돌아오셔서 내장산에 올랐던 날은 비가 내려도 좋았다. 랑은 외장 플래시까지 들고나가 포즈부터 포토제닉인 부모님 사진을 열심히 멋있게 찍어 드렸다. 난 정말 최악의 패션으로 길을 나섰는데 그때 찍은 사진이 우리 엄마보다 더 연식 있는 사람처럼 보여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차마 올리지 못했다. 그 정도로 아빠와 함께 보내는 시간 자체에 몰입했나 보다. 축축한 단풍길을 걸을 때면 아기를 안고 있는 내가 미끄러질까봐, 품에 있는 아이가 추울까봐 부모님이 수시로 나를 챙겼다. 애 안고 있느라 번거롭고 더운데 엄마는 두르던 스카프를 나에게 주었다. 아빠는 차에 둔 캡 모자도 내게 씌워주셨다. 부모님 덕에 더 심각한 패션 테러리스트가 됐지만 부모님 사랑에 테러리스트 상태를 유지했다. 케이블을 타고 오른 전망대에서 다른 봉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다녀오고 싶다는 아빠를 신랑이 따라나섰다. 크게 가파른 코스는 아니었지만 비도 조금씩 내리는 날씨에 아빠가 감기라도 걸릴까봐 불안한 마음으로 뒷모습을 보았다. 몸 움직이시는 걸 좋아하는 분인데 그 정도 욕심부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내장산 국립공원에서 단풍놀이 하던 날. 긴 줄을 기다려 오른 전망대 카페에서 어묵이랑 떡볶이를 먹었는데 쌀쌀한 기운 속에 얼마나 맛있던지.





곁에 있어 줘서 모두 고맙습니다.



손주를 바라보며 살 의지를 굳건히 다진 아빠가 감사할 따름이다. 돌잔치 때 손녀의 성장 동영상을 보시고 아빠는 눈물을 훔치셨다. 그날 운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다. 마주 보이는 우리 엄마는 영상이 재생되는 10분 내내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을 쏟았다. 이모들도 고모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을 모두 공감해서였다. 태린이가 태어나서 자란 12개월은 단순한 12개월이 아니다. 할아버지를 살려낸 시간이다. 아이가 유독 외할아버지를 따르고 좋아해서 그 시간들이 아름다울 수 있었다. 태린이는 장성에서도 아픈 곳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았다. 할아버지를 위한 아이처럼 걱정거리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런 태린이가 기특하기만 했다. 우리 아빠를 살려준 참 고마운 내 새끼. 무엇보다 잘 견뎌주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어주는 아빠한테 제일 감사하다.



참, 장기 휴가를 자주 내서 아빠를 향한 나의 마음을 챙겨준 신랑에게도 진심으로 고맙다. 나와 내 동생을 대신해 서울 서쪽에서 강남까지 아빠 모시고 진료를 다니고 검사하는 날에도 일일이 옆에 붙어 아빠를 살폈다. 아빠를 관찰하고 챙겨주고 우리에게 상황을 말해주었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신랑을 친아들처럼 여기신 것 같다. 아빠한테 도움되는 영상이 있다면 노트북에 연결해서라도 바로 보여드렸고 폐암 환우와 가족들이 남긴 후기 몇 백 편을 읽고 브리핑을 했다. 어찌 보면 아빠를 살리려는 마음이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신랑이 미운 순간에도 그때를 떠올리면 다 용서가 된다. 나도 시부모님을 그렇게 예쁜 마음으로 내 부모처럼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버님한테도 아빠, 어머님한테는 엄마라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온 지 꽤 됐다.





가족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돌이켜 보니 태린이와 해외여행은 단 한 번 갔어도 값진 여행을 이미 많이 해왔다. 처음엔 부모님과 함께 열심히 국내 곳곳을 다녔는데 그건 효도지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혼자 배낭 두르고 다니는 여행만 갈망했을까. 잊고 있었다. 혼자 여행을 다니다가 외로워서 고독했던 순간을. 여행 중 엄마 목소리에 뭉클해하고, 할아버지와 동네 뒷산도 같이 못 갔던 일이 후회로 남아 목놓아 울던 날들을. 스페인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길에서 가족을 애타게 그렸던 한 걸음 한 걸음을 까맣게 잊고선 혼자만의 여행 타령만 해댔다. 어리석게 말이다. 이제부턴 친정부모님이 어디 여행 가신다면 귀찮으리만큼 따라붙는다. 시댁 식구들과도 기회가 있으면 더 한 번 만나려고 신랑을 부추긴다. 한 번이라도 함께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다. 그래서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자꾸 가야 한다. 지난 나의 깨달음도 수시로 되뇔 수 있도록 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함께했던 순간들이 늘 내 삶 곳곳에 남아 좋은 영양분이 되어주었다. 우리 아이들도 가족과의 시간을 평생 추억하며 언제나 바른 사람으로 커나가길 바란다.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지만 서로 사랑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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