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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수니 Jun 16. 2018

너와 나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일상

미술관 산책을 즐기는 이유


뒷주머니가 조 차고 아이가 아프지 않으면 미술관부터 발걸음 했다. 회사 다닐 적엔 미술관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땐 정말 미련하게 앞만 달리던 나날이었으니깐. 일을 그만두고 나니,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마냥 소중해졌다. 그렇다고 예술을 깊이 아는 사람도 아니다. 내 안에 있는 감각을 되살리고 싶었을 뿐. 결혼해서 둘째 녀석키우는 지금까지, 생각도 감성도 바짝 메말라버렸다. 처음에는 오로지 나의 세포를 살리기 위해서 갔다. 어디든 나가야 직성이 풀리기도 했다. 이제는, 태린이랑 같이 가고 싶어서 전시장을 찾다. 제 나름대로 즐기는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은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큼 값지다.



난 2016년 겨울, 올라퍼 엘리아슨의 <세상의 모든 가능성>으로 우리 모녀는 미술관 산책을 시작했다. 태린이는 늘 그랬듯이 앞서 걸어나갔다.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오르는데도 손을 자연스럽게 뻗었고, 이끼 냄새를 맡아보려고 허리를 굽. 천장에 매달린 기형 모형을 세모로, 빙글빙글 돌아 내려오는 원반을 동그라미로 표현했다. 잘 데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가이드라인(guide line)을 잘 지켜서 마음껏 다니라고 풀어두었더니 몇 바퀴 신나게 돌다가도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보는 작품이 생겼다. '뒤집힌 폭포'가 그랬다. 거꾸로 흐르는 물줄기가 신기했을까. 지나가던 외국인 부부가 "몇 살인데 이렇게 빠져드냐"라고 물었다. <무지개 집합>도 태린이가 반했던 작품이다. 이슬비 같은 물방울이 천장에서 떨어졌고, 그 물방울이 아래 조명에 비쳐서 무지개가 보였다. 무지개를 발견하기보다 우산을 쓰고 빗속을 뚫고 다니는 재미가 더 컸다. 우린 이 전시를 두 번이나 봤는데, 처음에는 이슬 안팎을 왔다 갔다 하며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기 바빴고 다음엔 이슬 밖으로 원을 크게 돌며 공간을 느꼈다. 아이가 즐길수록 올라퍼가 어찌하여 세상을 바꾸는 작가로 인정받았는지 공감했다. 모든 가능성을 아이에게도 열어주는 기분이었다.


저만의 방법으로 작품을 즐기는 태린. 올라퍼 엘리아슨 '무지개 집합(왼),' '뒤집힌 폭포(오)'  @리움미술관



아이를 따라 한 시간 정도 관람좋아하는 스타일이 한눈에 보였다. 지난해 3월까지 열렸던 <프랑스 국립 오르세 미술관전 : 19세기 미학의 세계>에서 태린이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사실주의 그림들 앞에 오래 있었다. 그러고는 자기 만의 언어로 나에게 말했다. 그 말이 불어처럼 들리던, 일본어처럼 들리던, 깐따라삐아어로 들리던, 나에게 하나 중요하지 않았다. 좀처럼 말하지 않던 아이가 느낌을 표현해줘서 고맙기만 했다.



빛줄기 밟기 놀이 중. '더퀸즈시크린 전' @전쟁기념관

미디어아트는 태린이가 좋아하는 장르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놀다가 우연히 만났던, <'모네 빛을 그리다' 인트로 전>. 어두워서 무서울 법도 한데 한 걸음씩 내딛으며 빛을 밟았다. 눈에 비친 세상이 다채로웠는지 규모가 작았던 전시장을 1시간 동안 왔다 갔다 했다. 스크린 속 색채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바라보던 딸을 보며 그 이후로 미디어아트 전시라면 빠지지 않고 챙기고 있다. 지난해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더퀸즈시크릿 전 여왕의 정원>에선 빛이 다양하게 연출된 작품을 감상했다. 채광이 주는 빛줄기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백남준 작가의 '다다익선'을 보러 과천으로 갔다. 거대한 텔레비전 물체와 유리 천장을 뚫고 쏟아지는 빛이 어떤 조화를 이루는지 위층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신나게 뛰어 올라가면서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태린이에게 혼자 즐길 시간을 주고 있었다. '여기 가라! 저리 가라'라는 말로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총명한 눈빛과 몸짓을 간직하고 싶어서 적당한 거리에서 따라 걸었다.



아무 말 없이 집중해서 관람 중. 엄마가 동생을 안아주고 있으니 유모차는 자기 차지다. '롯데 무브 컬처: 그대 나의 뮤즈 반고흐to마티스 전'  @한가람미술관



앙리 마티스 작품을 본 뒤부턴 화풍이 달라졌다.

미술관 산책을 즐기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 태린이가 미술놀이를 좋아한다. 펜만 있으면 하루 종일 그려대는 아이다. 웬만해선 말을 하지 않는 아이가 커다란 전지 한 장을 바닥에 깔아주면 손바닥 발바닥까지 물감칠을 하며 거침없이 표현을 한다. 미술관에 다녀오면 태린이 그림에 조금씩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올해 초 <그대 나의 뮤즈 반 고흐 to마티스 전>를 보고서는 확실히 차이가 났다. 붓에 물감을 잔뜩 찍더니 손목 스냅을 이용해 고흐처럼 동그랗게 흔적을 남기질 않나. 앙리 마티스가 우리 집에 온 마냥 도화지에 거침없는 습작을 남기기도 했다. 딸이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미술관대체로 공간이 트여있고 천장도 높아 답답하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아이가 뛰어다녀도 티가 나지 않는 곳이다. 밖으로 나와 넓게 깔린 잔디와 조각품, 솟아나는 분수를 보여주면 소풍 나온 기분이다. 날씨 좋은 날엔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야외도 좋다. 전쟁기념관도 가끔 찾는다. 실내에 커다란 비행기와 탱크가 여러 대 있을 정도로 공간이 커서 마음껏 뛰어도 잃어버릴 걱정 없다. 거기다 사람도 적다. 태린이는 전쟁기념관에서 늘 마라톤을 한다. 전시 보러 가서 작품만 보여주면 아이가 지루해할지도 모른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마음껏 뛰게까지 해주면 태린이가 엄마한테 10점 만점에 10점을 준다.



물론 아이가 항상 얌전히 작품을 보러 다니진 않는다. 그때그때 다를 수도 있다. 사람에 치여 예민해할 수도 있고, 그저 뛰어다니는 게 좋아서 아이랑 달리기 시합만 하다 돌아오기도 한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전시도 좋지만 사람한테 묻히지 않고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시간과 전시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가 접한 경험이 힘들고 고달팠다면 아이는 다시 전시 보러 오기 싫어할 테니. 우리 모녀는 시행착오를 통해 아이와 엄마의 절충점을 찾아가는 중이다.



엄마인 나는 언제 감상하느냐. 아이잠들고 처음부터 다시 본다. 재관람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 전시장 끝자락에서 재운다. 실컷 뛰어놀고 피곤해할 때다. 태린이는 유모차에만 앉혀 두면 금방 잠드는 편이다. 그때부턴 나의 세상이 펼쳐진다. 이어폰을 꽂고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나만의 감상을 시작하노라면 아이도 엄마도 모두 행복한 육아가 완성되는 기분이 든다. 둘째는 아직 어려 그런지 안아주어도 유모차에 두어도 3시간은 푹 잔다. 우리 아이들은 외출해서도 빠짐없이 낮잠 서비스를 선물해준다. 우리들의 공생 관계는 아직까진 완벽해 보인다.


아이와 함께한다면 평일 오전 오픈 시간이 가장 좋다. 개인적으로 '*문화가 있는 수요일'은 오히려 피한다. <프랑스 국립 오르세 미술관전>은 개인적으로 힘들었다. 어린이집 방학 기간이기도 했고 하필 문화가 있는 수요일이라 어른도 아이도 엄청 많이 몰렸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사람들 틈에서 딸아이를 쫓아다니기 바빴다. 엄마가 따라가니 다른 곳으로 더 신나게 달리며 자유를 만끽하던 딸. 자신을 쫒는 엄마를 도망 다닌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던 날이었다. 유모차를 두고 다른 곳에 관람하는 걸 제지한 터라 그날따라 유모차에 타지 않는 아이 때문에 애를 먹었다. 직원한테 수유실에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고 재관람을 요청했다. 때마침 낮잠 시간이라 아이를 재우고 다시 혼자 전시를 둘러보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마감일이 다가와도 사람이 몰리니 전시 기간을 알아두고 미리 다녀오길 추천한다.

*문화가 있는 수요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2014년 1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제도로 매달 마지막 수요일엔 공연장, 미술관, 고궁, 영화관 등 주요 문화시설에서 무료 또는 할인을 통해 다양한 문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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