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우리가 어쩌다 발걸음 한 구례는 태린이가 좋아하는 것만 모아둔 선물 박스였다. 새들과 각종 곤충들, 바람 소리가 들려주는 배경음악은 실내악과 다름없었고, 곳곳에 깔린 민들레와 각종 풀들은 금세 친구가 되어 주었다. 마당에서 뛰어놀던 강아지 둘과는 끈끈한 인연을 맺었다. 숙소 주인과 지역 주민들과 눈을 맞추고, 마당에서 노는 강아지와 마음을 나누었다. 눈에 들어온 초록 세상이 마음에 드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길을 오르내리면서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늘 그랬지만 럭셔리 호텔보다 시골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무엇보다, 자기만 바라보는 엄마 눈빛에 가슴 벅차 했다. 구례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걸까. 어딜 가도 사람이 없어서 모녀가 각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었다.
구례 여행의 첫 방문지는 화엄사, 그다음 날엔 하동 쌍계사였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상을 거부감 없이 바라보는 딸을 보니 7개월 차 임산부는 시작부터 안심이 됐다. 태린이는 엄숙한 장소인 절을 좋아했다. 그럴 만했다. 흙, 돌, 맑은 공기, 탁 트인 공간, 둘러싼 푸르른 산, 풍성하게 우거진 길쭉길쭉 나무, 새들이 소박하게 부르는 예쁜 노래, 주차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숲길,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숨바꼭질 공간, 체력훈련장을 방불케 하는 높은 돌계단 등등. 아이 입장에선 모든 게 즐길거리였다.
아이는 스스로 놀이거리를 찾았다. 돌 하나하나 주워 모아 높게 쌓기도 하고 바닥에 기차도 사자도 만들었다. 만드는 기쁨이 넘쳐날 때면 엄마한테도 돌을 하나씩 쥐어주었다. 태린이는 절이 어색하지 않았다. 자연환경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생명체 덕분이었다. 사람한테 까탈 부리는 녀석인데 동식물에겐 마음을 참 잘 내어주었다. 그림책 『마음이 퐁퐁퐁』 속 주인공 돼지 같았다. 길을 가다가 풀에게도, 계단을 오르다가 키 큰 나무에게도, 땅바닥에 열심히 걸어 다니는 개미에게도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말이 느린 우리 아이가 유독 잘하는 말, "나무야 안녕~ 나 태린이야~." 나는 그저 적당한 거리에 앉아 바라만 보았다. 다른 관광지처럼 사람이 붐비지도 않으니 공간이 넓어도 아이를 잃어버릴 일도 없었다. 다른 분께 피해를 주거나 위험할 일이 있을 때만 내가 먼저 움직였다.
곤란한 상황이 오긴 왔다. 물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우리 딸이 놀잇감을 제대로 만났다. 절 약수터에서 바가지로 열심히 물을 퍼서 다른 바가지로 옮겨댔다. 사람들이 마셔야 할 바가지를 가지고 놀아도 눈치 주지 않는 어른들에게 감사 눈빛을 보내다가도 통제할 순간이 왔다. 바닥에 물 구덩이가 크게 생길 때쯤, 운동화는 물론 바지까지 홀라당 젖어버린 거다. 코감기에 걸린 아이가 잠시 불어오는 산바람에 상태가 나빠질까 봐 다른 놀이로 유혹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상의만큼은 젖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이동했다. 결국 돌바닥에 누워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하필 대웅전 앞이었다. 남자 한 분이 그냥 놀게 두라고 태린이 편을 들어주셨는데 좀 억울했다. 30분 넘게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주었던 나였지 않나. 아이가 물구덩이를 만들 정도로 놀았어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
화엄사 저녁 예불 시간이었다. 스님 네 분이 돌아가며 북과 종을 치셨고, 그때 태린이가 바로 아래 대나무 벽에 돌을 던지며 소리를 조심스러우면서도 신나게 질렀다. 동영상을 찍는 분도 있고 스님들도 한창 예식에 열중하실 때였다. 대나무에 부딪치는 돌 소리가 북소리와 제법 어울려 애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스님 한 분이 태린이를 내려다보셨다. 그리고 활짝 웃어 주셨다. 타북을 마치고 법당을 향해 걸어가시던 스님들은 이번엔 돌 쌓기에 빠진 아이를 보면서 미소를 지어주셨다. 아이 장난을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눈길이야 말로 선물이었다.
쌍계사로 가던 길에 들린 오미마을은 알고 보니 명당터로 유명한 곳이었다. 월명산과 방방산, 오봉산, 계족산, 섬진강이라는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고 오미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무학대사도 명당터로 언급했던 곳. 어쩐지. 마음이 탁 트이는 들판과 지그시 우리를 감싸주고 있는 지리산 자락이 보약 같았다. 태린이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한 줄기만큼 욕심냈던 노란 꽃에게도 다른 나무로 날아가던 참새한테도 "안녕~". 졸졸 흐르는 시내와 넓은 들판을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언젠가 구례에 또 오면 이 마을에서 묵겠다고 마음먹었다. 태린이한테 일찍 찾아온 낮잠 때문에 우리나라 3대 명당 중 하나라는 운조루는 소망 리스트에 넣고 차로 돌아갔다.
우리가 이틀 묵었던 수월리 소소는 만다라 문양을 그리는 이현주 작가님이 사는 집이자 작업실이다. 구례 광의면 높은 곳에 위치한 이곳은 탁 트인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지리산 자락과 노랗게 물들어가는 들판을 말이다. 늦은 오후 도착한 우리 모녀는 적당히 강렬한 노을 아래 짐을 풀기 시작했다. 지인 소개로 와서 그런지 긴장이 풀렸다.
태린이는 마당에 있는 강아지 두 마리에게 바로 달려갔다. 잭슨과 까미 두 녀석이 어린아이를 보고 엄청 사납게 짖어대는데도 서슴지 않고 다가갔다. 겁 없는 딸아이를 보며 작가님이 더 걱정하셨다. 흥분한 나머지 물어댈 태세인데도 태린인 계속 손을 흔들며 강아지들에게 인사를 해주었다. 간식도 줘보고 공도 던져줘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음 날을 기약하며 우린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온 지 한참 지났는데도 거친 왈왈 소리가 계속 들렸다. 아쉬움이 클만한데 아이는 덤덤했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우리가 시골 환경에 금방 적응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게 됐다. 침대도 세탁기가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세 살짜리 적응력에 엄마는 더욱 놀랐다. 태린이가 방 곳곳을 시찰하며 콩닥콩닥 춤추듯 뛰어다녔다. 마음에 들었나 보다. 뛰지 말라고 말할 이유가 없으니 나도 같이 쿵닥쿵닥 뛰었다. 엄마가 따라 뛰니 더 신이 났다. "(좋아서) 깔깔깔깔. 깔깔깔깔. 깔. 깔. 깔. 깔." 그런 아이를 보며 "우리 아기 진짜 기분 좋구나. 그래도 숨은 쉬어야지. (쪽쪽쪽 뽀뽀 세례)"
태린이는 일어나 창문을 열자마자 무얼 안다는 듯이 "우아~~ 우아~~!"라고 말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들판과 멀리 보이는 산을 벌써 볼 줄 아는 걸까. 신랑도 우리에게 오고 있으니, 그날은 마을 어딘가를 산책하며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난 어릴 적부터 앞만 보고 달리기만 익숙한 사람인데 구례는 그런 나를 자연스럽게 멈추게 해주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강아지들이 태린이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진짜 친구가 됐다. 서로 이곳저곳 몸을 만지다가 뽀뽀도 해주고 나란히 앉아 같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실망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들 앞을 서성이던 내 딸.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잭슨과 까미를 기다려주었을까. 살아있는 존재들과 교감하는 법은 어디서 어떻게 알았을까. 하루를 꼬박 기다려서 친해졌는데 집에 갈 때 두 녀석한테 인사하라고 했더니 울기는커녕 최선을 다해 손을 흔들어줬다. 언젠가 만날 인연인 것처럼. 지난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고 오는 세월을 믿고 쓸 줄 아는 너일까. 법정 스님 말씀이 생각나던 순간이었다.
아침에 일찍 깨서 아이가 새근새근 자는 모습을 봤다. 잠자리가 바뀌어도 까탈 부리지 않고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보니 감사했다. 천사 같던 아이 자던 모습을 언제부턴가 게을리 바라봤다. 아이가 눈을 뜨자마자 이불 김밥 놀이를 했다. 아이를 이불에 씌우며 "뿅 나타났다~ 뿅 사라졌다~" 대단한 놀이도 아닌데 그토록 좋아하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둘째 가진 뒤 입덧도 심하고 배도 불러오고, 일상은 뭐 그리 지치게 하는지, 아이한테 적극적으로 놀아주지 못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구례 여행을 계기로 온종일 어린이집에서 시간 보내는 아이에게 너를 게을리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엄마는 얼마든지 너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놀아주고 바라봐주는 사람이라고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엄마랑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그때, 나를 보며 마냥 웃고 있는 아이를 보며 모든 근심 걱정이 사르르 사라졌다. 나 역시 딸에게 선물을 받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