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말 안 듣길 잘했어."
집 밖에 있는 아내를 좋아하지 않는 신랑. 그런데 어쩌나! 나는 나갈 궁리만 하는 걸. 신랑 눈치가 워낙 지독해 외출을 포기하고 살다가도 꼭 한 번씩 터졌다. '욕심 하나도 다 내려놓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기분이 처지고 처져, 지구 맨틀 아래로 수년에 걸쳐 마라톤을 하고 돌아온 기분이랄까. 집에만 있으면 정말 그랬다. 알랭 드 보통 작가도 그러지 않았던가. 가정적 환경은 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 계속 묶어두려고 한다고. 나를 들여다보고, 못난 나를 이겨내려면 다른 장소가 필요했다. 호텔이랑 비행기까지 알아보다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떠나지 못하는 내가 더 슬펐다. 현실이 주는 무서움. 또다시 암흑기였다.
2017년 일기장 메모
6월 26일
하루 종일 집안일. 오전이 허무하게 지났다. 배가 너무 고파 현대백화점 식당가에서 떡만둣국 한 그릇 겨우 넘기고 컴백해 잠깐 숨 돌리고 보니 태린이가 돌아올 시간. 애랑 잠깐 시간을 보내고 저녁 준비하고 치우니 밤 9시. 오늘은 좀 우울하다. 하루 종일 청소만 했다. 신랑은 위험하다고 무조건 나가지 말란다. 바깥출입을 함께할 마음도 없으면서! 그저 쉬라고 하면서도 집에선 정작 나몰라라. 이럴 땐 집안일도 덜하더라. 더구나 이것저것 해줘도 먹지 않는 딸. 그냥 지치고 눈물 글썽이는 날.
6월 27일
우울증이 심해졌다. 집에만 있으면 계속 치우기 바쁘고 태린이랑 대강 놀아줘도 금방 저녁 시간이다. 식사부터 챙겨야 하니 삶이 벅차다. 정작 내가 먹는 밥 따윈 관심도 없는 신랑. 늘 자기만 피곤하고 힘들지. 내가 잠깐씩 나가서 사람들도 보고 오는 게 많이 싫은가 보다. 내 우울증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정말 정말 관심도 없지. 나 따위 보일 리가 없지! 흥!
임신 호르몬까지 나를 제대로 괴로혔구나 싶었다. 둘째 출산을 석 달 정도 남겨두고 미쳐버릴 정도로 답답할 때 사남매가 나서 주었다. 레옹 오빠 그리고 레아 언니, 동갑내기 마농. 불어 스터디에서 만난 우리는 어느 봄날 점심을 같이 먹다가 따뜻한 햇볕에 취해 듬직한 사이가 되어 주자고 약속했다. 친오빠가 없는 여인 셋에게 울타리 같은 레옹. 사업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어린 동생들한테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육아랑 가사 등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많았던 마농과 나를 위해 소풍을 기획했다. 저런 어두운 일기를 쓴 며칠 뒤였다. 사남매는 신랑과 만났던 자리에서 "셀린(프랑스 내 이름)을 데리고 바람 좀 하루 쐬고 와도 되겠냐?"라고 미리 물었다. 기분 좋게 간청하는 레아 언니 목소리에 신랑은 허허허 웃으며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마농과 나는 딸들도 데려가기로 했다. 늦게까지 놀다 와도 신랑한테 싫은 소리 하나 들을 일도 없었다.
서산에 들러 생선구이 정식과 멍게 해삼이 가득한 해물 세트까지 배불리 먹고 말로만 듣던 천리포 수목원에 도착했다. 바다를 옆에 끼고 조성된 수목원인데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라 바다를 볼 수 없었다. 하얀 구름이 지상까지 내려오더니 나를 휘감았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에서 안갯길을 뚫고 걸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 자욱하게 안개가 낀 날이 많았다. 손전등 하나로 바닥을 밝혀 가며 길을 용케 걸어가곤 했는데 어떤 길이든 나를 바르게 이끌어 주었다. '안개 길' 하면 갈리시아 지방에 처음 간 날도 생각났다. 동행들에게서 한참 뒤처져 걷다가 길을 잘못 들어버렸다. 달팽이 껍데기처럼 빙글빙글 모양이었던 산 길을 내려가다가 어쩌다 깊숙하게 자리 잡은 마을까지 갔는데 그때 천둥 번개가 치고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늑대처럼 생긴 커다란 개 두 마리가 나에게 달려와 짖어댔다. 겁에 질려 머리가 하얗게 됐을 때 지나가던 현지인 부부가 차를 세우고 나를 태웠다. 역시나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었다. 두 분은 날이 너무 어둑하고 비도 쏟아지는데 몸이 안 좋아 보이니 숙소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순례자를 배려한 듯, 이 마을로 오기 전, 그러니깐 길을 잘못 들어서기 직전까지 데려다 줄 지도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겁에 질렸던 나는 차를 얻어 타고 예정된 숙소에 잘 도착했다. 젖은 몸으로 숙소에 딸린 카페에서 동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을 잃어 놀랬던 마음과 이곳까지 날 안전하게 데려다준 두 분에게 감사한 마음, 친구들이 날 찾고 있을지 모르는데 나 혼자 차를 타고 숙소까지 먼저 왔다는 미안한 마음. 복잡한 마음이 눈물을 쏟게 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무서울 게 없었고 그저 내 길과 내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만 커졌다. 아름다운 추억 덕분에 이제는 안개가 가득한 곳에 있으면 천국으로 가는 길 같았다. 맑은 날 햇빛이 내려쬐는 날씨보단 촉촉한 날이 요며칠 기분과 어울려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더구나 이쁜 요정들이 내 앞에 있었다.
우리 태린이는 서은 언니가 좋은지 수시로 언니 손을 잡고 어른들을 앞서갔다. 태린이는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야 성에 차는 편인데 서은이는 그런 아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주었다. 묵묵하게 자기를 옆에서 지켜봐 주고 천천히 다가오는, 태린이한텐 아주 취향저격 언니였다. 둘은 시키지 않아도 하루 종일 손을 잡고 다녔다. 태린이는 직진 본능에 혼자 앞을 마구 걷다가도 발걸음을 멈추고 아차 싶어 언니 손을 잡았다. 바다가 파랗게 보일 거라 생각하고 바다생물 친구들을 데려갔지만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바다향기를 맡으며 바닥에 친구들을 깔기 시작했다. 서은 언니한텐 인심이 좋았다. 아끼는 상어 한 마리를 언니에게도 고민 없이 주었다. 아이 둘은 상어를 한 마리씩 쥐고 수목원을 걸어 다녔다. 화장실을 갔다가 수국 꽃다발이 가득한 곳에 갔을 때는 태린이는 꽃 한 다발을 예쁘게 손에 쥐려고 애를 썼다. 줄기가 제법 질겨서 쉽게 뜯기지 않자 속상해서 울먹거렸다. 엄마 도움으로 꽃다발 하나를 얻자마자 언니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소중히 두 손에 올린 채. 그 꽃을 언니한테 주고 싶어서 그렇게 수국이랑 실랑이를 벌였던 거다.
천리포수목원은 그야말로 수국 세상이었다. 50여 종류의 수국이 저마다의 색깔과 모양으로 한 여름을 밝히고 있었다. 사실 수국을 잘 몰랐다. 지인들이 수국 보러 제주도에 간다고 했을 때야 비로소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다. 그 예쁘다는 수국을 보러 종달리든 비양도든 가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도 없던 순간이었다. 그때 우연히 기대치도 못하게 수목원에 왔다가 사방에 퍼진 수국을 만났다. 기다렸다는, 얼마나 예쁘게도 폈는지 이런 태교가 따로 없었다. 사방에 핀 꽃을 보고 있자니 사랑 문제로 울고 있다면 울지 말고 꽃을 보라던 정호승 시인 말이 떠올랐다. 꽃이 피어나는 이유를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시인은 설명했다. 여름에도 화려한 꽃밭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해졌다. 꽃잎이 정성스럽게 모여 풍성한 다발이 됐다. 그 한 다발이 내게 선물 같았다. 수국에 대해 찾아보다 신랑과 나의 이야기 같아서 피식피식 웃었다.
수국은 조금만 건조해져도 바로 말라버리는 꽃이다. 하지만 물속에 담가 두면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살아난다. 영원히 시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잠시 변덕을 부리는 것이다. 마치 나를 바라봐달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그래서 관심을 가져주면 금세 다시 활짝 핀다. 또 적합한 환경에서는 다른 어느 꽃보다도 오랜 시간 피어 있다. 그래서 수국은 '진심'을 담은 꽃이면서도 '변덕'의 꽃이다. (출처: 쁘띠 플라워, 2010. 4. 20. ㈜살림출판사)
수국의 꽃말이 '변심' 인건 토양 환경과 조건에 따라 색깔이 변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파란색으로 보이다 점점 붉게 변하는 녀석도 있을 정도다. 전문가 한 분은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 가상하다고 했다. 친근해졌다. 어떤 상황에서든 꿋꿋하게 이겨내는 모습이 나 같았다. 한 송이 한 송이 모여 그럴듯한 꽃봉오리를 이룬 모습도 끊임없이 노력하던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정말 나는 하루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루도 소중하지 않은 날도 없었다. 내 친구 마농도 그랬다.
우리 넷은 아이들만 바라봐도 좋았다. 그날 일정과 걸음걸이는 아이들에게 맞춰졌다. 아이들 속도에 맞추니 어른들은 더 자세히 식물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예쁘네~"하고 지나치고 말 것을 더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고 조심스럽게 손길로 어루만져주기도 했다. 어린이집을 안 가는 대신 엄마와 단둘이 데이트하러 나온 아이들은 그저 기분이 좋았다. 어디 숨어서 깔깔거리던 아이들. 마농과 나는 자기 애가 넘치고 자존감도 강하며 열정이 넘쳐나는 유형이다. 엄마가 된 걸 후회하진 않지만 엄마가 되어 포기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스스로에게 안타까웠다. 원하던 일을 전부 할 수는 없었다. 자유를 한 번 얻기 위해 신랑과 결혼 내내 끊임없이 투쟁했던 우리. 그런 닮은꼴에 서로 다독여주며 각자의 꿈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우리 둘은 신랑한테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이를 데려가기도 했는데 두 아이가 즐기고 있으니 우리 기분도 정화되고 있었다. 우리가 아이를 잘 낳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임산부인 내가 아이를 데리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놀다 오다니. 픽드랍 서비스도 기가 막혔다. 레옹 오빠는 문정동에서 신림동 사는 레아 언니를, 그 다음엔 일산에 사는 마농을 싣고 우리 집에 왔다. 늦은 밤 돌아올 때는 나를 먼저 데려다주었다. 임산부라서라기 보다 날 어떻게든 챙겨주고 싶은 마음 하나하나가 고마웠다. 아이가 어리고 가족이 아니면 마음 먹기 힘들 수 있지만, 지인들과 가는 여행도 특별하다. 아이 둘을 정성스럽게 챙겨주던 마음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거다. 겉치레 우정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여행. 나처럼 하루 여행으로 열흘을 사는 사람에게 사남매 우정 여행은 아직도 예쁜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