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떠수니 Jun 23. 2018

배불뚝이, 340킬로를 달리다.

두 아이 엄마가 되는 길

심신이 지친 요즘, 작년 이맘때 구례 여행이 생각난다. 뱃속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 한 가지를 빼곤 상황이 비슷하다. 신랑이랑 사소한 일로 다퉜는데 상한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신랑은 늘 그랬듯이 다독여주않는다. 남자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잘 못한다지만 그런 모습에 유독 용서가 안 될 때가 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엄마한테 달라붙고 집착해 체력까지 바닥나 버렸다. 빡빡한 지갑 사정을 알고도 어디론가 멀리 도망치듯 여행하고 싶다. 이럴 때 구례가 내게 주었던 선물을 다시 떠올리며 지친 마음을 다독여본다.





삶에 물질적인 요소를 자꾸 끌어들이다 보니 아이 하나 키우면서도 스트레스를 꽤 받았다. 돈이 없으면 포기해야 할 게 많아 보였고 가혹한 현실에 좌절해 신랑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법정스님께서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이 인생에서 중요하다 하셨거늘,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녀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하셨거늘, 난 왜 못 들은 척 살아왔던가. 학창시절부터 가장 애정 하던 책도 『무소유』가 아니었나. 돌이켜보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만 생각했지, 엄마로서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지는 대충 넘어가고 말았다. 두 아이 엄마가 된다니깐 마음만 무거웠다. 자신을 추스르고 돌보기도 버거웠던 터라 봄만 애타게 기다렸다. 집을 나서기만 해도 지금의 내가 제대로 보일 거라고 믿었다. 따뜻해지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지만 어느덧 여름이 잔인하게 와버렸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두려워졌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한 답답함이 체지방이 온몸을 휘감듯 기분을 망쳐댔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 송곳이 된 나를 꼭 한 번 다스려야 했다.



해질 무렵 도착한 구례 풍경. 지리산 자락이 엄마마냥 포근하게 반겨주었다. 차를 오래 타서 한계가 온 딸내미가 짜증내는 와중에도  가슴 벅차서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 부부 사이에 흐르는 파도가 거칠어질 때마다 나 같은 여행 중독자는 어떤 식으로든 떠나야 마음이 진정됐다. 언제든 기회만 있으면 떠날 생각을 했던 나는 돈이 생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급하게 짐을 싸고 동네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웠다. 하원한 아이를 태우고 시동을 다시 걸 때는 기다렸던 순간이라 그런가 짜릿하기도 했다. 당연히 신랑한텐 알리지 않았다. 사실 구례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알지도 못했다. 그렇게 멀 줄이야. 드넓은 평원 위를 몽롱하게 떠가는 기분 탓인지 도착거리가 쉽게 줄지 않았다. 운전하면서 혀를 얼마나 찼는지 모른다. 떠나기 하루 전, 프랑스어 스터디 멤버들과 책거리를 한 자리에서 강릉이든 전주든 무작정 떠나겠다고 하는 나를 다들 말렸다. 7개월 차 임산부였고 혼자 운전해서 아이까지 데려가겠다는 나를 말려야 바람직하긴 했다. 간절한 내 마음을 읽은 한 오라버니가 언니처럼 대화 나눌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며 다른 지역으로 가지 말고 프랑스 유학파 출신 작가님이 운영하는 숙소로 가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바로 구례였다.



방문을 열면 보이는 시골 풍경. 구례 광의면 수월리소소 숙소에서.



구례는 참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곳이었. 연고 하나 없는 내게 불편한 기색 하나 주지 않았다. 둘러싸고 있는 지리산 자락은 기다렸다는 듯 하느님 품처럼 감싸주었고, 앞에 흐르는 섬진강은 친정집처럼 은은한 물결로 노래를 불러주었. 아이가 낮잠이 들면 주변을 즐길 시간이 왔다. 그 마을의 색깔이나 공기, 지나가던 사람이 주는 온도가 온몸에 느껴졌다. 그때서야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 섬진강 드라이브 때도 태린이가 잠들어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쌍계사 가던 길에선 눈 앞으로 떨어진 한 줄기 빛을 보며 순간의 행복을 움켜줬다. 숙소 주인인 작가님까지 몇 년 만나온 사이처럼 따듯하게 챙겨주니 마음 평온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찻집에 들러 잠든 아이를 눕히고 조용하게 시간을 보낼 때였다. 사장님도 자리를 비우시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 앉아 있으니 눈물이 쏟아졌다. 삼면이 통창인 장소에 앉아 바람이 나무를 좌우로 흔들며 다독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위로를 받았다. 조용히 읽고 있던 책 『내 옆에 있는 사람』에서 이병률 작가가 남긴 말이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을 열리게 해줬다. 행복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며, 그 욕구 또한 강렬해지는 것, 그 또한 사랑이 여행이랑 닮은 점이라는 그 말. 어느 순간 마음속 어두운 구름이 걷혔다. 미운 마음도 사르르 사그라졌다. 줄곧 멋진 결혼 생활을 꿈꿔왔는데 생각한 그림대로 흘러가지 않아 답답했나 보다. 내 욕심에 눈물과 화를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미안해. 어쩌다 멀리 와버렸어. 내가 자기를 정말 사랑하나 봐. 그래서 더 욕심부리고, 마음대로 잘 안 되면 너무 속상하고 그랬어." 여행 사흘 만에 신랑한테 생사 여부를 밝혔다. "어디야? 어서 돌아와~" 가끔 갑자기 사라지는 내가 익숙해져서 그런지 신랑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답변했다. 떨어진 며칠 동안 각자 반성했고 서로 더 사랑하는 법을 고민했다. 드디어 서로 한 걸음씩 다가가 예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신랑이 데리러 온단다.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고 구례까지 달려왔다.



쌍계사로 가는 벚꽃길.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힌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피레네 산맥을 걸어 넘고 만난 숲속이 떠올라 아이 잠들었을 때 찰칵.
쌍계사 가던 길에 들른  찻집. 낮잠시간은 칼같이 지켜주어 엄마에게 자유시간을 주는 고마운 딸이다.



결혼하고 나면 반려자에게 베풀기보다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상대적으로 커져서 미워질 때가 많아진 것 같다. 내가 더 사랑해주고 관심을 가져주면 될 터인데 왜 나를 위해서만 욕심을 부릴까. 내가 상대 마음을 더 열어주면 되는 것을. 그제야, 람을 변화시키려면 한 마디 옳은 말보다 사랑과 관심이 더 필요하다는 혜민스님 말씀이 떠올랐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작가가 그림책 『두 사람』에서 말했던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함께여서 더 쉽고 함께여서 더 어렵다. 결혼생활은 파도를 헤쳐 나가는 과정이지만 부부는 돛과 돛대처럼 각별한 존재이다. 더불어 부모로서 감정을 스스로 잘 다뤄 아이들을 바르게 이끌 의무가 있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보다는, 내가 가진 내면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어떻게 행복 해질까를 앞으로도 더 고민하며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엄마 스스로 행복한 모습을 아이에게 많이 보여주고 싶다.



여행은 여러 번으로도 부족하지만 매번 깨달음을 준다. 시작과 끝 어딘가에서 한 단계 성장할 기회를 얻는다. 깨달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유효기간이 무섭게 짧아져도 여행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어른으로 만들어준다. 어떤 풍경에 위로받을지 상상도 못 한 채. 그저 멀고 먼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구례 여행이 행복하게 마무리됐다. 역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땐 간절히 떠나는 이유가 다 있다. 이런 내가 모처럼 마음에 들었다. 아이 손 하나 잡고 훌쩍 나서면 그만인데 알면서도 왜 망설였을까. 끼니를 거르면 언젠가 탈이 나게 마련이다. 여행도 제때 떠나야 옳다.

이전 05화 너와 나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일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