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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수니 Aug 11. 2018

가끔은 럭셔리 여행

호캉스. 풀빌라. 올-인클루시브. 아이들 키우다보니 이런 단어가 귀에 유독 꽂힌다. 드물게라도 한 번 '럭셔리(luxury)'하게 떠나고 싶다. 해외로 가면 금상첨화. 호텔 로비에서 어깨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고 사진을 남기거나 푹신한 침대에 누워 뒹굴거릴 생각만 해도 설렌다. 못할 걸 알지만 룸서비스를 주문하고 싶다. 바다가 보이는 풀빌라 펜션에서 물놀이도 실컷 하고 싶다. 결혼 전까지는 꿈꾸지 않았다. 호텔 패키지를 몹쓸 소비재로만 여겼었고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고 자부했던 나였다. 미혼 시절에는 멈춰있는 휴양지 여행이 싫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나니 휴양지나 호텔 같은 존재에 집착하게 된다. 여행 열 번에 한 번 정도는 휴양지 느낌 나는 호텔에 욕심부린다. 남편한테 대접받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 키우며 열심히 살아가는 보상을 이렇게라도 받고 싶었던 걸 보면 나도 영락없이 여자다.


* 올인클루시브(all-inclusive): 식사(룸서비스)와 음료, 공연, 레저 비용 등 모든 서비스 경비가 포함돼 무제한으로 이용 가능하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낳고 나선 호텔로 바캉스를 떠나는 '호캉스'를 제대로 떠난 적이 두 번 있다. 첫 번째는 태린이 돌잔치를 치른 뒤였다. 2박 3일 일정으로 인당 50만 원이나 들어가는 신라호텔 에어텔 프리미엄 패키지를 이용해 제주도를 다녀왔다. 왕복항공권과 스위트 객실은 물론 조식, 브런치, 디너가 모두 포함된 가격이었다. 고급 외제차로 픽드럽 서비스까지 해주는, 말 그대로 럭셔리다. 빠듯한 형편에 이런 패키지를 마음먹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예정에 없던 돌잔치를 치르고 잔치 때 들어온 현금을 제주 여행에 쓰기로 했다. 아내가 간절히 원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결심한 신랑도 그동안 고생한 우리도 눈 딱 감고 쉬고 오자며 스스로를 애써 이해시켰다. 우리가 많이 지쳐있을 때였다. 제주도를 가더라도 이곳저곳 다닐 체력이 없던 상태였다. 유채꽃밭 한 군데 정도 다녀오고 호텔에서 물놀이나 하고 사진이나 실컷 찍기로 마음먹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호텔리어가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따라 나가 자동차 문을 열어주면 곱게 타기만 하면 됐다. 짐은 직원들이 정성스럽게 실어주었다. 우리 앞엔 생수병도 놓여 있다. 이런 서비스가 익숙하지 않던 우리는 촌스러운 사람처럼 비칠까봐 인증 사진도 소심하게 슬쩍 찍었다. 짐도 방까지 다 가져다주니 사장님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배정받은 룸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우리 집 안 방보다 더 큰 화장실과 침실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신랑은 생각보다 옛날 느낌이 가득하다고 툴툴거리면서도 테라스에 바다부터 보러 갔다. 방에서 바다가 보인다고 좋아했다. 태린이는 신났다. 조금씩 뛰기 시작했을 때였다. 사진 거부증이 있는 아이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만큼 깔깔 깔깔 웃으며 구석구석 빠르게 걸어 다녔다.



태린이와 행복했던 순간들 @제주신라호텔



준비한 의상을 수시로 갈아입으며 호텔 놀이를 했다. 욕실과 화장대 거울 앞에서부터 방에 넓게 자리잡힌 소파, 엘리베이터 옆 장식대는 물론 호텔 산책로 곳곳을 돌아다니며 오래 간직할 사진을 남겼다. 여기저기 다니는 시간보다 아이를 즐겁게 만드는 시간에 집중하다보니 아이 표정도 밝았다. 외부로 나갈 필요 없이 미리 지불한 비용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5성급 호텔이라 그런지 기분상 모두 훌륭했다. 그동안 정신없다는 핑계로 '물개 태린'이에게 제대로 물놀이도 못 시켜준 우리는 수영장을 한 번이라도 더 갔다. 역시 물을 좋아했다. 아이가 행복하니 엄마도 행복했다. 이튿 날은 반나절만 차를 빌려 유채꽃 밭에 다녀왔다. 생각보다 강했던 3월 봄바람에도 아이는 그저 좋아했다. 아이가 행복하니 우리도 행복했다. 제주도 여행은 동선도 크고 여기저기 다니게 되어 하루만 여행해도 체력이 달리는데, 그때는 무리하게 돌아다니지 않았으니 우리도 몸이 가벼웠다.



두 번째 호캉스는 태윤이 출산을 앞두고 떠났다. 태린이 때처럼 태교여행을 가지 못했던 나는 뭐가 그리 억울했는지, 서울 곳곳이라도 매일 같이 돌아다니면서도 신랑한테 쉴틈없이 쏘아댔다. 마누라 심술 때문이었는지, 신랑은 임신 37주 차가 되어서야 핫플레이스인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호텔을 예약했다. 새로 생겨 깨끗하기도 내부 인테리어도 멋져 사진 찍을 곳도 많은 데다 실내외 수영장도 잘 되어 있어서 아기 엄마들에게 인기 만점인 호텔이었다.



언제부터 호캉스를 좋아했다고 그 순간을 그토록 기다려왔을까. 태교여행은 그리도 중요했던 것일까. 어디라도 가야 가슴에 맺힌 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 출산 예정일 전까지 최대한 자유를 누리고 싶었고, 첫째와 특별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신랑이 나를 생각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신랑은 줄곧 만삭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고 싶다고 했다. 태린이가 어두컴컴한 호텔을 싫다고 짜증을 부리는 와중에도 우리는 호텔 곳곳을 걸어다니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신랑한테는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진짜 모델마냥 과감한 포즈도 자연스럽게 취하게 된다. 신랑이 나를 담아줄 때가 참 좋다. 연애시절 찍힌 내 모습을 보면 신랑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보였다. 지인들이 공감할 정도였다. 그때 기분을 되살릴 수 있어서 그런지 카메라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신랑을 늘 기다리게 된다.


신랑이 예쁘게 남겨준 둘째 만삭사진. @파라다이스시티호텔 내부



수영장에서 3시간 이상 노는 아이. @파라다이스시티 실내수영장



태린이는 호텔을 싫어할 때가 많아졌다. 인위적인 조명과 공간 속에서 뛰어노는 일이 재미 없어진 눈치다. 발도르프 어린이집을 다녀서 더 그렇다. 인테리어가 멋진 호텔이라 한들, 매일 자연에서 뛰놀던 아이가 다소 컴컴한 장소를 정겹게 느낄 순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멋있는 호텔 조명 아래 예쁘게 나온 사진이 없다. 호텔 거부감에 사진 찍기에 협조하지 않던 딸이 수영장에 가면 눈빛이 달라졌다. 불행 중 다행이다. 엄마가 몸과 마음 편하자고 온 이 곳에서 딸에게 미안한 마음을 덜 수 있었다. 태린이는 호텔방 침대만큼은 변함없이 좋아한다. 평소 잠자리보다 편한 걸 아는지 잠들어도 푹잠 들긴 하지만 갈 때마다 엄마 아빠가 자기를 가운데 앉혀두고 뽀뽀 놀이하던 추억을 계속 좋게 기억하나 보다.



침대는 태린이가 호텔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공간이다.



신랑과 아이가 잠이 들면 조명 세기를 줄이고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극에 달했던 마음을 정리하려고 호텔 책상에 앉아 괜스레 끄적이다 보면 '답답한 일이 있었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마음이 깨끗해진다. 마치 밤바다 산책하다 바람을 맞고 나면 복잡한 마음이 날아가버리듯 말이다. 나처럼 자기보호 본능이 강한 사람에게 희한한 일이다. 알랭 드 보통도 『여행의 기술』에서 이따금씩 건물 내장에서 엘리베이터가 쉭 하고 솟아오르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에 누워있으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 밑에 줄을 그을 수 있다고 말한다. 파울로 쿄엘료가 『마법의 순간』 책에 남긴 조언도 떠올랐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러면 멀리 있던 사람들도 당신을 찾아올 것입니다." 이제야 신랑이 사랑스럽다. 내 기대를 조금이라도 충족시켜주려 애쓴 모습을 떠올리니 안쓰럽기도 했다. 나도 신랑에게 더 노력해야지 마음을 먹었다. 이 정도면 신랑도 호텔 효과를 보았다.



그 흔하다는 호캉스도 쉽지 않은 우리 가족. 신랑한테 툴툴거리기도 하지만 불만 없이 산다. 책을 사고 공짜로 받은 에코백을 명품백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나이지 않던가. 여행을 항상 호사롭게 갈 마음은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한 환경에 노출하면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 않다. 다만, 기차도 비행기도 자동차도 나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신랑의 사랑을 사진으로라도 확인하고 싶을 때,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지치거나 실제로 몸이 아픈데 기분은 전환하고 싶을 때, 다른 사람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은데 집에는 있기 싫을 때, 한마디로 엄마인 내가 그냥 한 번씩 끌릴 때, 또다시 별이 많이 붙은 호텔에 머물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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